서울은 북한산을 진산으로 하고 북악산·남산·인왕산·낙산 등 크고 작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또 산줄기를 뻗어 내리는 지형상 많은 고개도 있었다. 고개는 옛날부터 백성들의 교통로였다. 또 고개마다 다양한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 조상들의 애환과 삶, 숨결이 전해오고 있는 고개 속에 담긴 이야기를 알아봤다.

 

▲ 장승배기역에 서 있는 남성상의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여성상의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다.ⓒ천지일보(뉴스천지)

현륭원 가다가 적막한 고개에
장승 두개 세우도록 명 내려
지역 간 경계, 이정표 역할 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서울 동작구 상도동은 몰라도 장승배기는 안다. 그만큼 이 일대는 장승배기로 오래 전부터 이름이 알려져 왔다.서울 동작구 상도2동과 노량진동과의 경계가 되는 고개. 이 고개턱에 장승이 서있어 이곳을 장승배기라 불렀다.

이 일대 마을 이름도 역시 장승배기라 불렀다. 이를 알려주듯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 6번 출구와 동작도서관 사이에는 장승이 오롯이 세워져 있었다. 도심 속의 장승. 왠지 조금은 낯설다. 오늘날 새로 만들어진 장승이라 고전미는 덜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역사를 알려주고 있어 소중한 듯 했다.

◆지역 간 경계, 이정표 구실한 ‘장승’

그렇다면 왜 이곳에 장승을 세웠던 걸까. 사실 장승은 오늘날에 점차 사라지는 것 중 하나다. 예전에는 동네 어귀나 사찰입구에 장승이 어김없이 서 있었다. 장승은 우리 민족의 삶과 애환이 담겨 있는 고유 문화유산이다.

장승의 기능은 무엇일까. 첫째는 지역 간의 경계표 구실, 둘째는 이정표 구실, 셋째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이다. 길가나 마을 경계에 있는 장승에는 그것을 기점으로 한 사방의 주요 고을 및 거리를 표시했다.

▲ 장승배기를 알리는 교통표지판 ⓒ천지일보(뉴스천지)

◆사도세자 아들 정조 쉬어가

이곳의 장승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장승배기는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와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사도세자는 부왕인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죽음을 당한다. 그 후 아들 정조가 1777년 왕위에 오른다.

정조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를 애통해했고, 1789년(정조 13)에는 양주 배봉산 기슭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소를 조선 제일의 명당이던 수원 근교 화산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했다. 그 후 정조는 매년 수원 현륭원으로 참배하러 가서 아버지의 넋을 위로했다.

이때 현륭원으로 가는 정조의 어가(御駕)가 이곳에서 쉬어갔다. 그 당시 이 일대는 나무숲이 가득 우거져있었는데,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고, 비라도 부슬부슬 내리면 등골이 오싹했다고 한다.

이에 정조는 이곳에 두 개의 장승을 세우도록 명을 내렸다. 남성상의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여성상의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다.

▲ 장승배기역에 서 있는 두 장승 ⓒ천지일보(뉴스천지)

장승은 이정표 역할을 했고, 왕이 어가를 멈추고 쉬어 가는 곳이기에 잡귀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도 했다. 장승이 세워진 후 사람들은 안심하고 이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이때부터 장승배기란 지명도 붙게 됐다.

하지만 이곳 장승도 일제강점기의 수난을 피할 수 없었다. 1930년대 일본인들은 상도동 일대를 택지로 조성하는 데, 이때 미신과 무속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장승을 없애고 근처에 아카시아를 심게 된 것이다.

그 후 이 일대는 아카시아 몇 그루만 남아 있었는데, 1987년 서울특별시기념표석 위원회에서 기념표석을 설치했다. 이후 1991년 11월에 노량진 제2동‘바르게살기위원회’에서 장승을 옛 모습대로 세워 놓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장승배기역 부근은 정조의 모습을 떠올리기에는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고개라고 하기에는 턱도 낮아졌고 나무숲도 사라진 지 오래다. 빽빽한 도심만 남아 있다. 그나마 이곳에 서 있는 장승이 오가는 이들에게 역사 속 옛이야기를 대신 들려주고 있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