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호국보훈의 달, 전쟁의 상흔(傷痕)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민족이기에 그 누구보다 전쟁의 참상을 잘 알고 있다. 굳이 6.25 동족상잔이 아니더라도 긴긴 세월 외세의 침략 속에 민족의 명맥을 이어온 민족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한 기막힌 역사와 함께 오늘이 있기에 우리는 순국선열을 향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묵념을 한다.

19세기 제정러시아시대 톨스토이는 문호(文豪)라는 호칭을 받는 몇 안 되는 소설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부활’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등 명작을 후대에 남겼고, 그중 대표작은 역시 ‘전쟁과 평화’다.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에 의해 러시아는 공격당했고 모스크바까지 나폴레옹의 손에 들어가기 직전, 갑자기 찾아온 영하의 날씨와 프랑스 군부 내 쿠데타로 인해 철군하게 되는 전 과정 속에 있게 되는 전쟁의 참상과 허무를 그려낸 작품이다. 톨스토이는 이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을 통해 무엇을 전하고자 했을까. 한마디로 전쟁에 대한 비판이었다. 소설은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허무 그 자체라는 점을 일깨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는 것이야말로 전쟁의 진정한 참 승리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하지만 전쟁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어느 한 구석 성한 곳 평화로운 곳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지구촌의 현실, 과연 평화는 찾아오는 걸까.

사람의 생각과 수단과 지혜로는 전쟁을 해결할 수 없다는 진리를 피로 얼룩져온 인류의 역사는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준 것은 아닐까 고민해 볼 때다.

신록의 계절, 대한민국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갈두산 사자봉 ‘땅 끝(북위 34도 17분 21초)’을 찾았다. 조선 중종 때 지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땅 끝 대신 ‘토말(土末)’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또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는 한양에서 땅 끝까지 천리, 한양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를 이천리라 해서 대한민국을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나아가 이 땅 끝은 지리적으로 동아시아 3국문화의 이동로이자 해양문화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백두대간의 끝자락인 이 땅 끝에 위치한 두륜산(頭輪山, 중국 대륙의 곤륜산과 백두산의 이름을 합친 이름)과 그 기슭의 ‘장춘’이라는 마을에 얽힌 ‘장춘구곡’ 설화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평화로운 장춘마을에 바다에서 아홉 마리 용이 들어와 평화롭던 마을에 해악을 끼치자 흠이 없는 ‘한 아이’가 용과 싸워 이기고 마을에 평화를 되찾았다는 의미 있는 얘기다. ‘땅 끝’과 ‘평화’, 이 두 단어가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가 있다. 먼저 땅 끝의 의미가 궁금하다. 과연 백두대간의 끝 즉 대한민국의 시작과 끝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대륙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걸까. 앞서 위도를 밝혔듯이, 또 ‘서기동래(西氣東來)’라는 말이 있듯이, 또 지구상에 땅 끝이 아닌 곳이 없듯이, 분명 땅 끝의 본질은 이면적인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기독교 성경에서 선지자 이사야 편 41장에 보면, ‘동방’ ‘땅 끝’ ‘모퉁이’ ‘해 돋는 곳’ 등의 표현들이 발견된다. 나아가 선지자 스가랴 편에도 물이 나서 ‘동해’와 ‘서해’로 흐르게 될 것을 약속해 놓고 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를 통해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오게 되니 곧 ‘해피엔딩’이다.

약 이천년 전, 중국 당 태종 때 이순풍과 원천강이 지은 ‘추배도(推背圖)’라는 예언서를 통해서도 동양과 서양이 핵전쟁 위협의 일촉즉발 즉, 지구의 멸망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한반도에서 ‘키가 세척(三尺童子)인 한 아이’가 출현해 위기를 해결하고 지구촌의 평화를 가져온다는 반전의 드라마틱한 예언을 약 이천년 전부터 남겨왔으니 이 시대에 그야말로 서프라이즈다. 어찌 여기서 끝날 얘긴가. 인도, 지금은 방글라데시의 성인 타고르도 약 백여년 전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내면서 이 한반도에서 신의 계시와 평화 실천자가 나타날 것을 말해 놨다. 그러고 보니 땅 끝의 또 다른 의미에 우리는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 창조주가 지은 만물 안에 지으신 이의 뜻하신 계획이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평화는 사람의 지혜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평화는 신의 철저한 계획 하에 약속한 때가 되어 약속한 한 사람을 통해 약속대로 이뤄져 가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아비규환의 현실 속에서도 약속한 때가 되어 홀연히 평화는 이루어져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놀라운 발견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평화의 대열에 함께 할 수 있는 영광을 기대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땅 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향한 희망의 노랫가락이 울려 퍼지는 시작점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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