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태 중국 북경화지아대학교 교수

 

다양한 민생민원을 해결하는 국민신문고에 거는 국민들의 기대가 크다. 그러나 기대가 큰 만큼 실망 또한 제한적이나마 큰 것이 사실이다. 왜 그런가. 민원 답변이 피상적인 답변으로 종료되는가 하면, 탁상행정으로 인해 민원 해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만 가지고 민원처리기관·민원담당자의 해결의지 부족을 지적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민원인의 입장에서는 고충민원해결이 한낱 구호뿐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국민신문고는 불공정 행위 신고, 적폐 청산, 민원의 효율성을 구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피상적인 답변으로는 민원답변의 만족도를 높일 수 없다. 민원인과 민원담당기관 간의 상호 이해·존중의 정신이 있어야 공존, 공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근 들어 민원분야도 더욱 확대됐으며 이에 따라 민원인의 요구 또한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 추세에 국민신문고의 역할은 민원해결의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법·제도 마련도 중요하지만 소프트파워의 변화에 따른 내실 강화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일부 민원인들은 국민신문고가 여전히 힘의 논리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점에 힘들어하고 있다. 민원인들의 의혹을 불식시키려면 행정 감시와 견제 법안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민원인이 공감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구체적·객관적 성격을 띠고 있어야 한다. 부싯돌이 불꽃이 되려면 부싯돌의 물리적, 화학적 성분 분석 등 이론적 분석도 중요하지만 직접 부싯돌끼리 부딪쳐야 한다는 실험적 경험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의 신문고 제도 역사를 살펴보자. 조선 태종 1년(1401년)에 등문고(登聞鼓)라는 북을 대궐 밖에 매달았다. 이 북이 최초의 신문고로 그 역할은 청원과 상소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의 신문고는 원래 중국 남송 시대 때 이뤄진 상소 및 고발 제도를 모방, 보완한 것인데, 임금이 직접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접수, 처리하도록 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신문고에 앞서 백성들의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으로는 서울에 주장관, 지방에 사헌부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 기관에서 백성들의 민원을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신문고를 울리게 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임금께 신문고를 울려 상소하는 데는 제한이 있었다. 그 이유는 종사(宗社)에 연계된 사정, 생명에 관계된 범죄, 누명에 관계된 사정 등으로 상소 내용이 한정돼 있었다는 점과 일반백성보다는 양반중심의 상소로 발전해 감에 따라 원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변질됐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여러 가지 폐단 때문에 신문고는 연산군 시대에 없어졌다가 영조 47년(1771년)에 부활되기도 했으나 순조 이후에 사라졌다.

민원을 제기하는 것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변화와 발전의 터닝포인트를 마련하는 데 있다. 그동안 정부와 공공기관 등에서는 민원을 귀 기울여 듣고 이를 제대로 처리하기 위한 노력을 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여전히 탁상행정처리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두고 민원인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은 결과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사실 민원 해결 방안이 담당자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것은 민원을 가감없이 수용하려는 자세와, 이를 눈높이에 맞도록 한계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창조적 아이디어의 물꼬를 열어야 한다. 불만족 원인의 개선을 통한 만족도 측정, 민원담당자에 대한 민원 평가제도 도입 등을 통해 현재의 신문고 제도가 더욱 실효성 있는 민원 관리를 위해 신뢰의 근간을 구축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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