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은 도시의 경계이면서, 도성민의 삶을 지켜온 울타리다. 근대화를 거치면서 도성의 기능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한양도성은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발굴과 복원과정을 거치면서 잃었던 모습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와 관련, 한양도성 전 구간인 18.6㎞를 직접 걸으며 역사적 가치를 몸소 체험하고자 한다. 

 

▲ 한양도성 낙산구간에 있는 낙산공원.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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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낙산구간] ①‘혜화문에서 장수마을까지’ 성곽마을 속살 엿보다
 

성벽 축조방식 달라 이색적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서울 성북구 장수마을 위쪽으로는 한양도성이 계속 이어져 있다. 이곳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성벽 밖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높은 성벽을 올려다보며 한걸음씩 발걸음을 옮기는데, 성벽 모양이 구간마다 조금씩 달랐다. ‘왜 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이는 축성 시기에 따른 거였다.

◆시대마다 변화된 성벽 축조

서울 한양도성은 축성시기가 조금씩 달랐는데, 그때마다 축조방식을 다르게 사용했다.

먼저 태조 대인 1396년 1월과 8월, 두 차례 공사를 통해 축성을 마무리했다. 산지구간에 쌓은 석성의 경우 편마암과 화강암을 주로 사용했다. 자연석에 가까운 돌을 막쌓기(허튼층 쌓기) 했다. 따라서 줄눈이 일정하지 않았으며 석재 사이에 틈이 많고 커서 작은 돌을 이용해 틈을 메웠다. 평지는 토성으로 쌓았다.

세종 대인 1422년 1월에는 도성을 재정비했다. 성벽의 바깥쪽을 이루는 면석(面石)은 크기와 상관없이 방형으로 다듬어 사용했다. 아랫부분은 비교적 큰 돌을 쌓고 위쪽으로 갈수록 작은 돌을 쌓아 최대한 가로 줄눈을 맞춰 빈틈없이 쌓았다. 평지의 토성도 이 당시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 시대에 따라 축조 방법이 다르게 지어진 성벽 ⓒ천지일보(뉴스천지)

숙종 대에는 모양이 더욱 견고해졌다. 1704년부터 무너진 구간을 여러 차례에 걸쳐 새로 쌓았다. 면석의 크기가 대체로 규격화돼 가로, 세로 40~45㎝ 내외의 거의 정확한 정방형 형태였다. 가로 줄눈을 맞춰 견고하게 쌓았고, 지형의 경사도와 상관없이 줄눈은 수평이 되도록 맞췄다. 순조 대에는 축조방식을 계승했다. 이 당시 면석의 크기는 50~60㎝가량이었다. 이 같은 시대별 축조방식을 알고 나니,성벽 모양이 절로 이해갔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과연 맞았다.

코너를 돌아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니 낙산공원이 나왔다. 낙산공원은 서울의 ‘몽마르트르’라 불릴 정도로 전망이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노을과 야경은 더욱 아름답다고 한다. 낙산공원 정상에서 동숭동, 혜화동 방향을 바라보니 이화장과 서울대학교 등이 보였다. 멀리 백악산과 무악재, 창경궁, 창덕궁 등도 볼 수 있다.

▲ 이화벽화마을 ⓒ천지일보(뉴스천지)

◆또 다른 세상 ‘이화벽화마을’

성곽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암문 하나가 등장한다. 암문은 성곽의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드는 비밀 출입구다. 성곽으로 통하는 문은 여러 곳이 있으나, 모두 적이나 일반인에게 노출돼 있다.

 

하지만 암문은 비상시에 사용하는 문으로 일반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만들어졌다. 전시상황에서는 군수물자 조달이나 비밀리에 군사를 이동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래서일까. 암문은 성인 한명이 겨우 오갈 수 있는 크기였다. 머리가 천장에 닿아 허리를 조금 숙인 채 암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70~80년대의 세상으로 들어온 듯 했다. 옛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골목을 누비며 다니는데, 순간 ‘여긴 어디지’하고 멈칫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제야 이곳이 ‘이화벽화마을’ 임을 깨달았다.

성벽 밖의 모습과는 달리 이화벽화마을은 활기가 가득했다. 이화마을은 낙산 성벽 안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 좁은 골목에 지은 지 오래된 주택이 많았다. 요즘에는 보기 힘든 달동네지만, 이곳이 유명세를 탄 것은 벽화 때문이다.

2006년 정부의 지원 하에 예술가들이 건물 외벽에 그림을 그렸다. 또 빈터에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마을의 이미지가 밝고 화사하게 변했다. 마을은 낙산 정상부까지 이어지는데 계단 끝에 오르면 한양도성이 울타리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이화 벽화마을에서 옛 교복을 입은 어머니들 ⓒ천지일보(뉴스천지)

도성 안에 형성된 옛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벽화그림은 다양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한 쌍의 기린, 천사 날개, 귀여운 어린왕자, 큼지막한 시계 등이 골목 곳곳에 그려져 있었다. 가파른 계단이 많았지만 관광객들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 멀리 옛 교복을 입은 어머니들도 보였다. 치맛자락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는 어머니들. 옛 교복을 입고 수줍어하는 이들은 소녀 같았다. 벽화마을을 구경한 뒤 다시 암문을 빠져나왔다. 다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온 듯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이제 내리막길이다.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수백년간 이곳에 자리한 성곽들이 길게 이어졌다. 우리 내 선조들의 보금자리이자 방어막이던 성곽의 역사적 가치가 피부로 느껴졌다. 그렇게 십분 쯤 걸으니, 저 멀리 흥인지문이 보였다. 이곳이 한양도성 낙산구간의 마지막 지점이다. 아쉬움은 남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흥인지문 구간이 흥미진진해졌다. 그곳엔 선조들의 어떤 삶이 담겨있을까.

▲ 이화벽화마을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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