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양주 다산유적지에 마련된 전시관 안의 모형. 다산이 붉은 치마를 이용해 글을 쓰려는 모습이 재현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다산 정약용, 유배지인 강진에서 제작
비단 치마 마름질해 두 아들에게 글 적어
몸가짐, 학문하는 자세… 3첩으로 구성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자녀가 나쁜 길로 가길 바라는 부모가 있을까. 아마 없을 거다. 조선시대에도 그랬다. 자녀가 올바르게 자라길 바라는 선조들의 마음도 똑같았다.

다산 정약용(1762~1836)도 그랬다. 그는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역사상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사상가다. 정조의 명으로 수원화성을 쌓는데 필요한 ‘거중기’를 만들었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여유당전서’ 등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이렇듯 세상에는 당대 최고의 실학자로 알려졌지만, 그도 아들과 딸을 둔 아버지였다.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하피첩(霞帔帖)’을 통해 알 수 있다.

◆붉은 치마로 만든 ‘하피첩’

보물 1683-2호인 하피첩은 정약용이 1810년 저술할 때부터 사연을 가진 유물이다.

하피(霞帔)란, 노을(하)빛의 붉은 치마(피)라는 뜻이다. 하피첩에는 선비의 마음가짐, 삶을 풍족하게 하고 가난을 구제하는 방법, 효도와 우애의 가치 등이 서술돼 있다.

정조가 1800년 승하하고, 노론과 남인의 당쟁 속에 1801년 신유사옥으로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 간다. 처음에는 경상도 포항이었지만, 이후 전라도 강진으로 옮긴다. 지금에야 차로 몇 시간이면 도착하는 강진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몇날 며칠을 걸어야 겨우 도착했다.

▲ 하피첩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하피첩은 정약용이 강진에 있을 때 제작된 거다. 부인 홍씨는 결혼 30년 되는 1806년(순조 6)에 살아서 다시 못 볼 것 같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시를 짓고,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 치마를 다산에게 보낸다. 다산은 부인의 시와 붉은 치마를 받고, 비단 치마를 여러 폭으로 마름질해 두 아들에게 경계하는 말을 적어 보냈다. 이것이 하피첩이다.

정약용이 직접 쓴 하피첩은 세 첩으로 구성됐다. 1810년 동암(東菴: 전남 강진 다산초당 유배시절 기거했던 암자)에서 저술했고, 몸가짐, 교우와 친족관계, 학문하는 자세 등 자손에게 바라는 삶의 태도가 적혀 있다.

서첩은 1첩은 ‘가족 공동체와 결속하며 소양을 기르라’, 2첩은 ‘자아 확립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닦으며 근검하게 살아라’, 3첩은 ‘학문과 처세술을 익혀 훗날을 대비하라’는 내용이다.

▲ 하피첩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시집가는 딸 위한 시와 그림

하피첩을 만들고 남은 천도 헛되이 쓰지 않았다. 1813년 정약용은 남은 천에는 하얀 꽃망울 가득한 매화가지 위에 두 마리 새가 정겹게 앉은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시도 적어 넣었는데, 바로 ‘매화병제도’다.

‘펄펄 나는 저 새 우리 집 뜰 매화 가지에 쉬는구나/
꽃향기 짙어 즐기려 찾아왔겠
지/
머물러 지내면서 네 집안
을 즐겁게 하렴/
꽃이 활짝 피
었으니 열매도 많이 열리겠구나’

그림 속의 두 마리 새는 부부의 화락을 상징하고, 풍성한 매화는 집안의 번창을 의미한다.

이는 시집가는 딸에게 귀양살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곡진하게 담아 보낸 걸작이다. 유배 간 아버지에게 시와 그림을 받아본 딸은 아마도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마터면 하피첩은 세상으로 나오지 못할 뻔했던 유물이다. 다산의 후손들이 대대로 보존하다가 6.25전쟁 때 분실되면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다 2004년 경기도 수원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가 습득한 것을 어떤 건물주가 입수했다.

이후 한 감정프로그램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2010년 보물로 지정됐다. 현재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표현 방법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 사랑은 아름다운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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