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만행 알린 첫 순직기자 장덕준 선생

6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장덕준 선생은 1892년 6월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나무리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장덕준 선생은 명신중학교에 진학해 1911년 졸업했으며 그 후 모교 교사로 2년간 봉직했다.

1915년에는 일본 유학을 떠나 세이소쿠(正則) 예비학교에서 공부했다. 동시에 재동경조선인유학생 학우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유학생들이 발행한 잡지인 ‘학지광(學之光)’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이 시기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와 같은 자유주의 지식인과 교류했으며, 귀국 후 신문을 발행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3·1운동 이후 장덕준 선생은 동아일보 창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1920년 4월 2일부터 4월 13일까지 ‘조선소요에 대한 일본 여론을 비평함’이라는 논설을 써서 3.1운동을 왜곡한 일본여론을 비판했다.

▲ 순직기자 장덕준 선생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뉴스천지)

장덕준 선생은 지병인 폐결핵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기자 생활을 계속해나갔다. 특히 1920년 여름에는 동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의원단을 취재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특파됐다. 그는 이곳에서 안창호와 함께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인 포터를 만나 한국의 실정을 설명했고, 의원단장인 스몰을 인터뷰해 기사로 실었다. 

한편 같은 해 10월, 간도에서는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에 패한 일본군이 그 보복으로 한국동포를 무차별 학살한 간도참변이 일어났다. 당시 장덕준 선생은 폐결핵으로 혈담을 토하는 상태였지만 간도참변 취재를 위해 혈혈단신 만주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곧 실종되고 말았다. 당시 나이 29세였다.

장덕준 선생이 실종된 지 10년이 지난 1930년 4월 1일, 동아일보는 그를 기리는 추도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에서 한 기자는 “의에 대한 용기, 봉공(奉公)의 정신, 이 두 가지 귀한 교훈을 우리에게 끼친 데 대해서 나는 씨를 과거의 모든 의인보다도 별달리 사모코저 하는 것”이라고 추모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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