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북한산을 진산으로 하고 북악·남산·인왕산·낙산 등 크고 작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또 산줄기를 뻗어 내리는 지형상 많은 고개도 있었다. 고개는 옛날부터 백성들의 교통로였다. 또 고개마다 다양한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 조상들의 애환과 삶, 숨결이 전해오고 있는 고개 속에 담긴 이야기를 알아봤다.

 

▲ 자하문 고개 마루턱에 있는 사소문 중 하나인 창의문 ⓒ천지일보(뉴스천지)

청운동서 부암동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자하문 있어 이름 불려
개성 자하동 같아 ‘자핫골’이라 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시대 한양의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인 ‘창의문(자하문)’ 앞에는 고개가 하나 있다. ‘자하문 고개’다. 자하문 고개는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창의문 고개라고도 하는데, 고개마루턱에 자하문이 있어 붙여졌다. 현재 이 일대는 윤동주 문학관과 시인 언덕이 조성돼 있기도 하다. 자하문 고개 버스 정류장 한 쪽에는 이곳이 청계천 발원지라는 표지석도 서 있다.

▲  ⓒ천지일보(뉴스천지)

◆인조반정 무대 창의문

이곳 언덕 위에는 창의문이 우뚝 서 있다. 창의문은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의 하나로 서북쪽에 위치하는 문이다. 창의문은 ‘북소문’이라 불리진 않았고 자하문이라 불렀다. 자하문이라 한 이유는 청운동 일대가 골이 깊고 수석이 맑고 아름다워서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하여 ‘자핫골’이라 했기 때문이다.

창의문은 건립된 지 18년 만에 폐쇄되기도 했었다. 태종 13년(1413)에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진 거다. 그래서 당시에는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했다.

창의문은 도성 사소문 중 유일하게 원형의 모습이 남아있는 문이다. 창의문은 ‘인조반정’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1623) 서인일파가 광해군과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한양성곽과 연결돼 있다 보니 창의문과, 자하문 고개에는 찾아오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 자하문 고개 ⓒ천지일보(뉴스천지)

◆무장공비 첫 검문 당한 자하문 고개 일대

창의문이 있는 자하문 고개 일대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사건과 얽혀 있기도 하다. 바로 ‘1.21사태’다. 이는 1968년 1월 21일, 북한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할 목적으로 31명의 무장공비를 남파한 사건이다.

무장공비들은 자하문 초소에서 경찰관의 첫 검문을 받게 된다. 이들은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다 불심검문을 받게 됐고, 정체가 발각돼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때 현장을 지휘하던 최규식 경무관이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망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은 사건 현장인 자하문 고개에 세워졌다.

▲ 고 최규식 경무관 동상제막식 (출처: 서울사진아카이브)

군경합동수색진은 일당 가운데 김신조를 발견해 생포했고, 31일까지 28명을 사살했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돼 작전은 마무리됐다. 이후 이곳 일대에는 자하문 터널이 뚫리면서 자하문 고갯길은 한적한 도로로 바뀌게 된다.

자하문 고개, 자하문 밖 한길에서 서쪽으로 조금 들어간 부암동 넓은 터전에는 ‘석파정’이 자리 잡고 있다. 수려한 경관과 정교한 정자 건물로 어우러진 이곳은 조선 말기 대표적인 별장으로 꼽히는 곳이었다.

원래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의 별장이었으나, 이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별장을 차지했다. 이처럼 자하문 고개 일대는 수려한 경치에 선비들이 좋아했던 곳이자,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1.21사태가 벌어진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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