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용 칼럼니스트

 

시험이 끝나면 서술형 답안지는 교사가 직접 채점을 한다. 출제 의도와 맞으나 정답과 살짝 거리가 있는 답들은 부분 점수를 준다. 정답과 비슷해 보이지만 출제 의도와 무관한 답을 써 내는 학생들도 간혹 있다. 예를 들어 주제를 물어 보는 문제에 소재를 답으로 쓰는 경우인데 안타깝게도 ‘0’점 처리를 할 수 밖에 없다.

한 학생이 4개의 서술형 문제 중 2개의 답을 그런 식으로 써서 감점을 받았다. 본인이 예상했던 점수에서 10점이나 감점된 학생은 평소에도 ‘욱’ 하는 성격 탓에 가끔 폭발하는 모습을 보였던 아이였다. 그런 이유로 채점할 때부터 그 학생에게 꼼꼼하게 감점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학생은 감점 이유를 다 설명하기도 전에 “에이 ×발, ×나 재수 없네… 씨”라고 갖은 욕설을 내뱉으며 자기자리로 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순간 딜레마에 빠졌다. ‘저 녀석을 다시 불러 세워서 교권 모독으로 훈계를 해야 하나?’ ‘지금 불러서 지도를 하면 감정이 격앙된 저 녀석에게 먹힐까?’ ‘교권 침해로 징계 하면 저 녀석의 행동이 고쳐질까?’ ‘무너져 버린 교사로서 내 자존심은 어떻게 회복하지?’ ‘저 녀석을 훈계하지 않는다면 다른 30명의 아이들은 이 상황을 교육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등 0.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나는 순간 결론을 내렸고 놀라서 멀뚱멀뚱 쳐다보는 아이들에게 말을 했다.

“얘들아, 화가 난다고 해서 선생님 앞에서 말과 행동을 상수처럼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지? 선생님도 무척 당황스럽고 화가 나지만 평소에 상수의 ‘욱’ 하는 성격을 알고 있어 한번만 참고 기다릴게. 상수가 화가 풀리고 잘못한 마음이 들면 그 때 선생님한테 사죄하러 올 것이라 믿는다. 상수가 스스로 자기행동에 잘못을 느끼고 변하는 과정을 우리 같이 지켜보자.”

화를 가라앉히고 이렇게 얘기하니 그제야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지며 ‘선생님 정말 대단하다’는 응원의 눈길을 보내왔다. 학생들과 수업을 하다 보면 교사인 내 자신이 참 구차해질 때가 많다. 교사 초임시절에는 감정 조절이 잘 안되어 욕설을 하는 학생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훈계하고 생활지도부에 처벌을 의뢰하곤 했다. 하지만 징계 받은 학생들이 그 때의 일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행동의 변화를 보인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상수는 처음 일주일은 내 수업 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있거나 없는 듯이 행동했다. 무심한 듯 옆을 스치며 “상수야, 아직 화가 안 풀렸니?”라고 넌지시 물어도 녀석은 영혼 없는 표정으로 내 질문을 외면했다. ‘상수에 대한 내 지도방식은 실패한 걸까? 녀석이 끝까지 뉘우치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2주일 정도가 지나자 상수가 내 눈에 띄는 빈도가 늘어났다. 옆 반인데도 쉬는 시간에 우리 교실에 들어와 노는 횟수가 많아졌다. 어느 날 우리 반에 다시 놀러 온 상수를 마지막 기회란 생각으로 불렀다.

“상수야, 이리 좀 와 볼래?”라며 부르자 녀석이 순순히 교탁 옆으로 왔다.

“상수야, 선생님이 ‘욱’ 하는 네 성격을 알기에 선생님께 무례한 행동을 했어도 참고 기다려주고 있는 거 알지?”라고 했더니 미안한 듯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상수가 먼저 와서 ‘죄송합니다’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는데…”라고 했더니 쑥스러워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라고 간신히 대답한다. 3주일간 끌었던 상수와의 ‘밀당’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녀석으로 인해 다쳤던 내 맘을 어루만지며 상수에게 말을 했다. “상수야, 감정을 잘 추스르고 언행을 조심하면 상수는 완벽한 사람이 될 거야. 네가 3학년이 되어 열심히 공부하려는 의지가 보여 선생님도 다 맞길 바랐는데 안타까웠어. 하지만 시험은 공정하게 원칙대로 채점하는 게 맞는 거잖아. 네가 다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10점이나 깎이니 얼마나 속상했을까 하는 마음도 들어. 실망하지 말고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라” 하니 녀석도 마음의 짐을 벗었는지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하고 간다. 녀석도 나도 불편했던 감정이 한꺼번에 확 사라진다. 상수가 이 사건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태도의 변화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산다는 건 수도승이 매일 수행의 과정을 겪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상처받은 내 맘을 스스로 다독이며 징계보다는 반성할 시간을 주는 방법을 선택한다. 결과가 확실치 않은 게임이지만 난 내가 꼭 이길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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