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명의 아까운 청춘을 보내는 날,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그래서일까, 때 아닌 추위와 비를 동반한 흉흉한 날씨마저 슬픔과 애도에 동참하고 있는 듯하다.

봄을 막는 기운은 지리할 정도로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시샘을 넘어 오는 봄을 방해하고 있다. 그러나 대자연의 섭리는 막을 수 없다. 악조건 속에서도 움이 트고 꽃은 피고 잎이 나는 순리는 거역할 수 없음을 그 누구도 아닌 자연 스스로가 증명하고 있다. 이것이 이치요 섭리라 하는 걸까. 옛 성인들은 이 같은 자연의 섭리를 통해 우리 인간의 삶의 지혜로 삼으라고 한다. 이 세상사 또한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으니 제아무리 능력이 있다 해도 혹 더딜지라도 막을 순 없다는 의미다. 즉, 송구영신이다. 그러나 송구(送舊) 즉, 가야 하고 보내야 할 것들이 그리 녹록치만은 않다. 목련화(木蓮花)! 봄에 온 가인과 같은 목련화도 추운 겨울을 이겨냈다. 그리고 영신(迎新) 즉, 새 소식을 들고 오는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 곧 정신으로 피어났다. 그러니 보내야 할 게 있으니 가야 하고, 와야 할 게 있으니 기쁘게 맞이하라는, 자연이 우리 아니 이 시대에 주는 귀한 명철(明哲)인 것이다.

올해 이 봄이 그렇다는 것이다. 가야 할 것은 가기 싫더라도 가 줘야 하며, 와야 할 봄과 그 봄의 생명력은 틀림없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새 사람 새 소식 새 나라가 오기까지는 그리 순탄치 않음을 만물의 이치 속에서 깨닫게 되니 곧 진리다. 일제강점기 때 민족저항시인이었던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생각난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상적 나라가 빼앗긴 게 아니라 어쩌면 그보다도 더 무서운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과 분별력이 무엇엔가 다 빼앗기고 무너져 내렸으니, 이보다 더 큰 패망이요 아픔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빼앗기고 잃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 빼앗긴 정신과 가치관으로 인해 자연만물이 대신 신음하며 탄식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눈은 떴다 하나 소경이요, 귀는 있다 하나 귀머거리다. 그러니 우리는 미물만도 못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음을 고백해야 할 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이 다 병들었다. 오직 내 생각과 내 영역만이 있을 뿐이다. 이제 무엇을 더 말하고 알려야 하는가.

세상적 지도자나 정신적ㆍ이념적 지도자나 다 철길을 이탈한 기차와 같이 제 길에서 이탈해 곧 닥칠 위험 속으로 맹렬히 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대로 끝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아무리 막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자연의 순리 가운데 힘들지라도 움트는 새싹같이 추운 겨울을 이기고 온 봄 길잡이 목련화가 있음을 진정 깨달아야 한다. 칠흑(漆黑) 같은 세상은 결국 새 사람 새 시대를 잉태하고 있었더라는 것이다.

새 사람은 새 시대와 함께 목련화 같이 모진 풍파 이겨낸 후 밝고 환한 웃음 띤 얼굴로 오리라. 그렇기에 힘들지라도 이겨내자 기다리자. 예부터 많은 성인과 철인이 예고한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을 말이다.

이제 다른 측면에서 우리의 내면을 좀 들여다보자. 무심코 길을 걷다가 돌을 차도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게 없는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인간의 본래 본성이다. 즉, 나를 돌아볼 줄 알고 내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슬기와 지혜를 우리의 선인들은 강조해왔다.

황우장사도 산천(山川)의 적은 잡아도 자기 마음속의 적은 잡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끝내야 한다는 것이고,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시 나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가 도래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깨닫는 자는 다시 태어날 것이고, 귀가 있어도 들어 먹지를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면 깨닫지를 못하니 그대로일 수밖에 없다. 결국 깨달으니 선인이요 깨닫지 못하니 악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때 있어지는 심판임을 어찌 알 수 있으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록 내가 악인일지라도 악한 것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면 되는 것이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흔들리는 것은 누군가가 밀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나 바위는 흔들어도 밀리지 않는다. 그러니 바위 같은 심지를 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온갖 세파가 나를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는 것이다. 흔드는 세파가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이 문제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시대를 탓하기 이전에 내가 바로 서야 한다는 진리를 또다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천년바위가 되어야 한다.

명심 또 명심하자.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