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바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바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1908년 ‘소년’지에 게재된 육당(六堂)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의 첫 구절이다. 신시 또는 신체시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이 시는 낡은 것을 부수고 무너뜨리는 생명력의 원천인 바다가 소년에게 새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시인의 당부가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신체시가 써진 20세기 초기에는 우리나라 역사상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많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고, 또한 한국문학에서도 ‘신문학(新文學)’이라는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 요체가 바로 신체시였던 것이다.

육당은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제에 체포되고 옥고를 치루는 등 애국활동이 있었지만 또 이와는 다르게 일제강점기 때 보인 친일활동으로 인해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히기도 한 인물이다. 그 사정은 차치하고서라도 근대화 시기에 신문화운동가로서 또 신문사 사장으로서 논설과 함께 많은 시조를 써오면서 전근대적인 보수·인습 사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위한 문학적 시도를 해왔다. 앞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신체시에서 보인 바와 같이 시의 기존 질서를 질타하면서 새로운 변혁을 추구해왔던 것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한국문학의 구분에서 큰 변혁을 이뤄낸 신체시를 굳이 글머리에서 언급한 것은 기존의 보수·인습사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어려운가를 말함이다. 그런 변화 시도가 마침내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한국문학의 자유시 형태로 발전하는 교량 역할을 했으니 좋은 교훈인 것이다. 잘못된 관행이 뒤덮인 구태(舊態)가 권위란 이름아래 잔존해왔던 폐습들이 시대를 망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 큰 방해물이 됐음은 역사의 교훈을 통해 이미 잘 알려진 터에 그러한 과거 인습과 낡은 권위는 없어져야 할 시대가 이제 우리 앞에 도래됐다.

사실 권위(權威)라는 자체, 즉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신’은 지도자로서 절대 필수불가결한 통솔의 권원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친 결과로 인해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는 현실은 ‘권위주의’라는 달갑지 않은 행태, 부정적 요소로 비쳐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탈(脫)권위’가 민주주의에 합당한 시대적 요구로 등장한 지금, 지난 시절에 보여 왔던 최고 권력자들의 권위(?)가 하나둘씩 무너져 내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에 대통령 자신으로부터 몸소 실천되고 있는 탈 권위의 많은 변화들을 국민이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당장, 권위의 상징이었던 ‘명찰’이 사라진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지금까지는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 정부의 3부요인 중 두 축을 비롯해 정당의 대표 또는 원내대표 등 내빈들이 대통령과의 회담에 응하기 위해 청와대 출입 시에는 직함과 이름이 적힌 명찰을 달아야 했다. 이 같은 모습이 역대정부에서는 관행으로 늘 있어왔는데, 5월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5당 원내대표와 첫 회동에서는 사라졌다. 청와대 명찰문화에 대해 언론과 일부 시민단체에서 권위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여론이 빗발치기도 했으나 허사였고, 권위 속에 묻혀버렸던 것이다. 이번에 문 대통령이 권위적이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청와대 상징을 바꾸라는 지시로 명찰 달기 관행이 사라졌으니 이것 하나부터가 낮은 자세의 획기적인 변화라 아니할 수 없다.

또 한 가지는 청와대 회담 당일, 문 대통령이 오찬 장소인 청와대 상춘재(常春齋)에 미리 도착해 원내대표들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사실 따지고 본다면 손님을 초청해놓고 다 모인 뒤에야 주인이 나타나는 것은 분명 예의가 어긋나고, 이는 최고 권력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권위를 앞세우고, 권위문화에 잘 길들여진 탓에 무감각했다. 그동안 역대 대통령의 영수회담 등 장면을 언론을 통해 무수히 봐오면서도 초청 인사들은 가슴에 명찰을 달고, 대통령은 가장 나중에 참석하는 것으로 알아왔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VIP가 가장 나중에 나타나는 것을 당연시해왔었는데, 문 대통령이 파격적인 변화를 행동으로 보였다.

새 정부 출범 초기부터 국민소통과 탈 권위의 새로운 변화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잘못된 관행과 적폐를 말끔히 정리하고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약속 이행에 힘입어 여론조사에서 문 대통령이 임기동안 ‘국정을 잘 이끌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87%로 나타났다. 전임 대통령들의 취임 2주차 직무수행 전망 조사 결과 중 가장 높은 수치로 “우리가 새롭게 출발하는 첫 출발의 의미를 갖는다”는 문 대통령의 공언(公言)에 국민이 동조하고 있다는 하나의 거증이다. 그러하듯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신체시가 한국문학사에 남긴 빛나는 족적처럼 또 새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당부와 같이 문재인 정부가 살맛나는 새로운 세상을 활짝 열어주기를 학수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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