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현재 미국 백악관의 매파들은 김정은이를 쉽게 낚아챌 수 있는 ‘두더지’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한두달 전만 해도 ‘군사적 정밀타격’이니 ‘참수작전’이니 금방 뭘 해치울 것 같은 미국이 지금은 대화모드를 서슴지 않고 강조하고 있다. 과연 현 상황에서 워싱턴과 평양의 대화가 가당키나 한 말인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김정은은 참수든, 대화든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가벼운 존재가 아니다. 약관의 나이에 최고 통치자에 오른 그는 뭔가 오기와 반발로 앞뒤 안 가리고 나갈 때 북한이란 ‘불량국가’를 이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종잡을 수 없는 북한에 대한 백악관의 진단은 오락가락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잇달아 대북 대화론을 언급해 주목된다. 전제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평화’를 말했고,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북한 체제 보장’까지 거론한 점이 예사롭지 않다. 한국의 새 정부 출범과 맞물려 미국의 대북정책 기조가 바뀐 것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분석도 나오는 형국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미국 핵 항공모함의 한반도 전진 배치 등으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됐던 지난달 상황을 생각하면 상당한 반전 분위기가 아닐 수 없다. 틸러슨 국무장관은 18일(현지시간) 홍석현 대미 특사를 면담한 자리에서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북한에 대해 정권교체도 안 하고, 침략도 안 하고, 체제를 보장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틸러슨 장관은 북한이 핵 폐기 의지를 보인다면 미국도 북한에 적의를 보일 이유가 없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다. 현 단계에서는 대북 군사행동을 상정하고 있지 않다면서 “우리를 한번 믿어 달라”는 말도 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도 홍 특사를 만난 자리에서 “어떤 조건이 되면 관여로 평화를 만들 의향이 있다”면서 다만 “북한과 대화를 위한 대화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노력을 이끄는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지난 16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핵·미사일 관련 실험을 전면 중단한다면 대화에 나설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한미 양국은 그동안 북한의 분명한 핵 폐기 의지가 확인돼야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 개시 조건을 ‘핵 동결’로 완화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올 만하다.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때문에 핵과 미사일을 개발한다고 주장해왔다. 체제 안전이 핵무기 개발의 최대 명분이었다. 북한이 워낙 예측하기 어려운 체제이긴 하지만 태도 여하에 따라 갑자기 대화 국면으로 전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핵 문제를 압박과 제재만으로 완전히 풀기는 사실 어렵다. 궁극적으로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느 단계에서든 대화와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대북제재를 하면서 대화의 문을 열어놓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북한과의 대화에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지금까지 북핵 역사를 보면 북한의 도발→국제사회 제재→북한의 태도 변화→대화와 보상→북한의 재도발이라는 악순환을 되풀이해 왔다. 대화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압박을 병행할 때 대화다운 대화가 이뤄질 것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북한과의 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미국에서 대북 대화론이 갑자기 부상한 것도 문재인 정부 출범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 한미 양국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상정하고 북핵 해법을 정교하게 조율해야 할 것이다. 다음 달 미국에서 열릴 한미정상회담이 더욱 중요해졌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나 돼야 적어도 한국이든 미국이든 북한과의 대화 명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김정은의 로드맵은 대충 이렇다. 즉 올해 안에 6차 핵실험을 단행해 비공인 핵보유국이 된 다음 ICBM까지 쏘아 올려 미국의 증원군 타격 등 완벽한 한반도 군사력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 기반 위에서 변화의 길이든, 대화의 길이든 가겠다는 것이다. 지금 김정은은 바로 이 절체절명의 문턱에서 트럼프 정권이라는 ‘악재’를 만나게 됐고, 문재인 정부라는 부드럽지만 무서운 정부도 만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고지가 저기인데”라는 말이 김정은의 입에서 자주 들려오고 있는 형국이다. 중국의 입장도 기존 같지 않다. 시진핑은 지난 2013년 북한의 제3차 핵실험의 폭음을 들으며 집권한 지도자로서 나름대로 김정은 정권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따라서 최근 중국의 북한에 대한 강도 높은 실효적 지배는 그렇게 쉽게 해제되기 어려울 것 같다. 향후 한두 달 안에 미국이든 한국이든 북한과 마주 앉는 날이 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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