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열. (출처: 박열의사기념관)

이준익 감독은 왜 독립운동가 ‘박열’을 주목했을까
“이렇게 멋진 사람 이야기를 후손들 모르고 살아 안타까워”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사도’ ‘동주’ 등 시대극에서 독보적인 연출력을 선보인 이준익 감독이 열두번째 작품 ‘박열’로 돌아왔다. 영화 ‘박열’은 1923년 도쿄, 6천명의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려는 일제에 정면으로 맞선 조선 최고 불량 청년 ‘박열(이제훈 분)’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후미코(최희서 분)’의 믿기 힘든 실화를 그린 작품이다.

준익 감독은 “20년 전, 처음으로 ‘박열(朴烈, 1902. 2. 3~1974. 1. 17)’이라는 인물을 알게 됐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지만 ‘이 분은 아주 특별한 분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참혹한 역사를 묻으려는 일본 내각을 추궁하고,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박열’에 대해 우리들이 모르고 산다는 것이 스스로 부끄러웠다. 그래서 영화로나마 ‘박열’의 삶을 꼭 보여주고 싶었고, 20년을 공들인 끝에 드디어 영화 ‘박열’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영화를 제작한 배경을 설명했다. 박열이 어떤 인물이기에 이준익 감독이 이토록 영화화하는데 몰두했을까.

▲ 이준익 감독. (제공: 메가박스㈜플러스엠)

1902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박열은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동참해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어린 나이에 일제의 폭압에 분노를 느낀 박열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정칙영어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항일투쟁을 위해 고학생들과 의혈단을 조직하고, 조선고학생동우회 간부로 활동했다.

1922년 말 한인들의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에 조직해 활동했으나 내부에서 공산주의 그룹과 박열 등 아나키즘 성향을 가진 그룹의 대립이 확연해지면서 흑도회는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박열은 ‘민중운동’을 한인 노동자들과 양심적인 일본인들에게 배포했다.

1922년 2월 박열은 평생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를 만나게 된다. 요코하마 태생인 가네코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제국주의 일본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는 자유 여성이었다. 도쿄 시내 작은 어묵집에서 조선유학생들과 만남을 가졌던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잡지에 실린 박열의 자작시를 읽고 강한 감동과 함께 그를 사랑하게 된다. 두 사람은 만나면서 서로의 사상에 공감했고 같은 해 11월 7일에는 ‘후데이센징’을 창간해 순수 아나키즘 사상을 선전했다.

1923년 조선인 15명과 일본인 6명 등 총 21명으로 구성된 불령사를 조직해 일본 아나키스트의 강연을 듣거나 국내의 파업투쟁을 후원하고, 사회주의를 매도한 조선기자를 폭행하는 등 반일 직접 활동을 주도했다.

▲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 (출처: 박열의사기념관)

이듬해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의 와중에 일본국왕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박열은 1925년까지 20여 차례의 조사과정에서도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히면서 불굴의 독립의지와 민족정신을 표출하기도 했다.

검찰에 기소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혹심한 심문을 받았다. 일본 검찰은 ‘대역사건’이란 엄청난 죄목에 비해 확실한 물증이나 증인을 확보하지 못해 애가 타는 상황이었다. 박열은 ‘음모론’과 ‘일본 권력계급에 전하는 불령선인’을 제작해 재판부에 제출했다. 예심과정에서 일본 사법부 측은 천황제를 비판하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 여러 차례 전향을 시키려 노력했지만 둘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26년 1월 공판에 앞서 박열은 재판장에게 ▲일체 자신을 ‘피고’로 부르지 말 것 ▲조선 예복의 착용 허용할 것 ▲자신의 자리를 재판장과 같은 높이로 설치할 것 ▲공판 전에 자신의 선언문 낭독 허용 등 4가지의 조건을 요구했다. 이후 조선어 사용과 좌석 설치는 박열 스스로 철회했지만 나머지 두 조건은 인정됐다.

일본정부는 같은 해 3월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박열은 미소를 지으며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후 형량이 무기로 감형됐지만 일제 패망 이후에도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1945년 10월 27일까지 22년 2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옥살이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초대돼 귀국했지만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했고 인민군은 그를 북으로 데리고 갔다. 북으로 건너간 이후 박열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정부는 박열의 공훈을 기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영화 ‘박열’에서는 당시의 박열이 활약했던 역사적인 사건이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연된다. 모든 장면은 픽션이 아닌 사실이다. 이준익 감독은 “이렇게 멋진 사람의 이야기를 나를 포함한 우리 후손들이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안타까워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일왕을 암살하려 했던 청년의 기개를 볼 수 있는 영화 ‘박열’ 개봉의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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