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스포츠 언론인으로서 근대 한국체육사에 관심이 많다. 그동안 한국체육 탄생의 역사는 체육사학자들이 많이 다루었다. 스포츠 언론인 눈에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근대 체육이야기는 결코 놓칠 수 없다.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인 인물인 서재필 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한국체육의 선각자로 활동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최근 확인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구한말, 일제강점기 미국유학파인 두 사람이 야구를 중심으로 해 국내에 근대스포츠를 도입하는 가교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최근 언론인 출신 고승철씨의 장편 ‘소설 서재필’에서 구한말, 서재필과 이승만 두 사람이 배재학당에서 만나 야구경기를 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두 사람과 관련된 한국 근대체육 역사가 궁금해졌다.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된 이 소설에서 두 사람이 야구하는  장면이 나왔다. “서재필이 투수를, 아펜젤러가 포수를 맡아 공을 던지고 받았다. 학생들이 돌아가며 배트를 쥐고 타자 역할을 맡도록 했다. 이승만은 배트를 열심히 휘둘렀으나 번번이 헛스윙했다. 소박하나마 이것이 이 땅에서 야구가 처음 소개되는 광경이었다.”

1896년 서재필 선생은 갑신정변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뒤 대학을 졸업하고 사면을 받아 귀국해 배재학당에서 아펜젤러 목사와 학생이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과 야구를 통해 만났다는 것이다. 고승철씨는 책 머리말에서 “서재필은 자전거를 처음 갖고 와 탔고 야구도 최초로 보급했다. 아마 골프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치지 않았을까” 하며 그가 체육인이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1945년 해방 후 미군정 고문으로 특별 귀국한 서재필 선생은 좌우익 대립이 극심한 정치집회는 참석을 거절하는 대신 체육단체에서 초청하면 기꺼이 응했다. 대한체육회가 창설될 때 고문으로 모시겠다는 제의가 들어와 흔쾌히 수락했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야구대회에서 시구를 맡기도 했다. 투수마운드에 서재필이 야구 모자를 쓰고 올라서자 2만여 관중이 우레 같은 박수를 쳤다. 여든이 넘은 노인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그의 몸은 유연했다. 힐먼 고등학교에 다닐 때 배운 투구 포즈를 잊지 않았다. 글러브에 공을 서너 번 툭툭 던지고 꺼낸 다음 오른팔을 쭉 뻗어 우아한 포즈로 공을 던졌다.” 서재필 선생은 최초의 서양의사로서 마라톤 최윤칠(1950년 보스턴마라톤 3위)의 과학적인 근육 관리를 지도했으며, 김계현 전 야구대표팀 감독에게 미국 야구 이론책을 건네주기도 했다.

서재필 선생보다 11살 아래인 이승만 전 대통령은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고종황제 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돼 5년여간 옥살이를 하다가 특별사면을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명문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23년 6월 미국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20명의 야구단을 꾸려 서울에서 동경 유학생팀, 배재학교, 휘문고보와 경기를 갖도록 주선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 야구시구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8년 미국 메이저리그의 세인트루이스가 내한해 한국 대표팀과의 친선경기에서 시구를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마운드에 올라오지 않은 채 관중석에서, 경기장에 서 있는 포수를 향해 던졌다. 시구를 위해 관중석의 그물까지 찢어 공간을 확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재필 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이 야구와 관련된 활동에 관심을 보였던 것은 두 사람이 미국 유학파로서 미국 국기인 야구에 애착을 가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 야구는 국민들의 열정을 모으며 통합과 화합을 이끄는 데 매개적 역할을 한 대표적인 스포츠 종목이라는 것을 혈혈단신, 미국 유학에서 외롭게 공부하면서 터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한말,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독립과 민족의 장래를 위해 헌신하면서도 근대스포츠를 이 땅에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 두 사람의 역사적 성과에 대해 역사적 관점에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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