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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고개 편] ③왜 맑게 갠 날 ‘진고개’서 나막신 신었을까
장수경 기자  |  jsk21@newscj.com
2017.05.18 08: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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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북한산을 진산으로 하고 북악·남산·인왕산·낙산 등 크고 작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또 산줄기를 뻗어 내리는 지형상 많은 고개도 있었다. 고개는 옛날부터 백성들의 교통로였다. 또 고개마다 다양한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 조상들의 애환과 삶, 숨결이 전해오고 있는 고개 속에 담긴 이야기를 알아봤다.

 

   
▲ 서울 중구 충무로 2가 세종호텔 뒤편의 야트막한 진고개. ⓒ천지일보(뉴스천지)

가난한 양반 몰려 살던 진고개
과거 낙방한 생원님들도 거주

그늘지고 습하고 흙이 몹시 질어
비만 왔다 하면 발 빠져 통행 불편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서울 중구 충무로 2가 세종호텔 뒤편의 야트막한 고개. 남산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오면서 형성된 이 고개는 ‘진고개’, 한자로는 이현(泥峴)이라고 불렀다.

무악재, 미아리 고개와는 달리, 매우 낮은 언덕인 진고개. 고개가 맞나 싶을 정도다. 그나마 이곳의 역사를 증명해 주는 것은 길가에 세워진 진고개 표지석이다. 하지만 길가에 덩그러니 놓여있어, 신경 쓰지 않고 걸으면 발견하지 못한다.

◆‘남산골 딱깍발이 샌님’ 말 생겨나

이곳이 진고개라 불린 이유는 뭘까. 그 옛날에는 이곳이 그늘지고 습한데다 흙이 몹시 질어, 비만 왔다 하면 통행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발이 푹푹 빠졌을 듯한 모습이 왠지 머릿속에그려진다.

조선시대에 이 고개 일대는 ‘남산골’이라고 불렀다. 남산의 북사면이어서 남향집을 지으면 산을 마주 보았기 때문이다. 또 산그늘이 길고 겨울해가 비교적 짧았다고 한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은 가난한 양반들이었다. 이들은 오직 과거 급제를 꿈꾸며, 글공부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남산골 딸깍발이 샌님’이라는 말도 있다. 이곳의 땅이 질다 보니, 맑게 갠 날에도 나막신을 신은 데서 유래했다. 또 샌님이라는 말은 생원님의 준말로, 남산골에는 불우한 양반과 과거에 낙방한 생원님 즉, 샌님들이 살았다는 데서 생겨난 말이다.

   
▲ 충무로에서 바라보던 진고개의 모습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일본인 거류구역 형성

1884년 갑신정변 이후부터 진고개 일대에는 일본인이 하나둘씩 모여 살았다. 그러면서 일본인 거류구역으로 형성됐다. 일본인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이 일대를 본정통(本町通) 즉, ‘혼마치 도오리’라고 했다.

본정통은 진고개뿐 아니라, 명례방 명동과 낙동·회동 각 일부 등 넓은 지역이 편입됐다. 진고개 일대가 일본인의 거주지가 된 건, 1885년에 일본공사관이 남산 기슭에 자리 잡아서였다. 이에 인접한 진고개 일대 등에 일본인이 자리를 잡았다.

자국에서 근대적 상품을 많이 들여왔는데, 개화기가 늦던 우리나라 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이 됐다고 한다.

◆세종호텔 부근에 있던 ‘굴우물’

진고개 세종호텔 부근에는 굴우물도 있었다. 이 우물은 깊은 데다 우물 안에 굴(窟)이 있어 굴우물이라 불렀다. 한자로는 굴정(窟井)이라 했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을 서술한 부지인 ‘한경지략’에도 “굴정은 남부 이현에 있는 우물이 깊고 굴이 있었기 때문에 그 명칭이 유래됐다”고 기록돼 있다.

굴우물이 원래부터 우물이었던 건 아니다. 처음 이곳을 발견한 건 인조 때 문신 이민구이다. 그는 지봉 이수광(李睟光)의 아들이다. 이민구가 13살 되던 해인선조 34년(1601), 길가에서 놀다가 우연히 바위틈에서 샘솟듯 흘러나오는 맑은 물을 발견한다.

   
▲ 오늘날의 진고개 모습. 명동의 한 거리로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곳이 됐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이민구는 아이들을 불러 이곳에 우물을 파 놓고 가장자리를 돌로 둘러놓았다. 그 후 길 가는 행인도 이 물을 마실 수 있게 됐는데, 언제나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고 우물의 물구멍은 더욱 파여져 굴 같이 됐다고 한다.

훗날 성인이 된 이민구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그가 66세가 되던 해에 진고개를 지나다가 이곳에서 발을 멈춘다. 골목 안의 굴우물이 과거 아이들과 돌을 쌓았던 그 모습이어서다. 어릴 적 감회에 젖은 이민구는 시 한 편을 짓는다.

‘그 어느 해 내 손수 샘물을 파서 넓혔는데/
지금 와서 보니 어느덧 50년이네/
돌우물의 시원한 물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물에 비친 초췌한 저 모습 이게 도대체 누구인가’

◆아스팔트 길로 바뀐 진고개

진고개는 광무 10년(1906) 아스팔트 길로 바뀐다. 당시 고개를 깊이 8척(2.4m)가량 파내어 낮추고 길을 닦았다. 이때 높이 5척(1.5m)의 방수 형태의 하수관을 묻어 일대의 하수를 통하게 했는데, 이것이 서울시내 하수구 도랑의 시초가 됐다.

지금의 진고개는 북적북적한 명동의 골목이 됐다. 하루에도 많은 사람이 이 고개를 지나다닌다. 하지만 옛 모습은 없다. 그저 표지석만이 외롭게 선조들의 숨결이 담긴 진고개를 알려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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