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오(吳)나라 왕 유비는 유중의 아들이었다.

유중은 고조의 형이며 고조의 천하통일 후 7년(기원전 200)에 대왕으로 책봉됐다. 유중은 흉노의 공격을 받자 나라를 버린 채 도망을 쳐 버렸다. 그리고는 샛길을 따라 낙양으로 올라와서 고조에게 자신을 맡겼다.

고조는 나라의 법대로 형제를 처벌하지 못하고 왕위를 빼앗고 함양후로 지위를 떨어뜨리는데 그쳤다.

한나라 고조 11년(기원전 196) 가을에 회남왕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다.

고조는 동쪽으로 군대를 보내서 형나라 땅을 평정하고 그곳 군대를 편입시켜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회수를 건너 초나라를 공격했다. 고조는 몸소 출전하여 반란을 평정했다.

유종의 아들 패공 비는 그때 활기 넘치는 20대의 나이였다. 기병을 이끌고 종군하여 경포의 군대와 기 땅의 서쪽에 있는 회추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런데 이 반란에서 경포에게 죽임을 당한 형왕 유가는 후사가 없었다.

유가의 영지인 오군과 회계군의 백성들은 성품이 급하고 날쌔어 젊은 왕이 아니고서는 다스릴 수가 없을 것이라고 고조는 고민했다. 그러나 자기 아들들은 모두 나이가 어렸다. 그래서 조카인 유비를 패왕으로 책봉하여 3군 53성을 맡겼다.

유비는 조정에 불려 들어갔다. 고조는 조카 유비를 보고 말했다.

“너에게는 모반의 상이 있다.”

고조는 그렇게 말하며 왕으로 봉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임명한 뒤였다. 하는 수 없이 유비의 등을 두들기면서 말했다.

“오십년 이내에 동남쪽에서 난이 일어난다면 우선 너에게 혐의가 간다. 천하는 유씨 일족의 것이다. 결코 모반 따위를 꾀해선 안 된다.”

유비는 머리로 조아리고 말했다.

“결코 모반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 당시 조착은 태자의 가령으로서 그 총애를 독차지 하고 있었다.

그는 틈이 있을 때마다 ‘오왕 유비는 횡포하고 잘못이 있으니 땅을 줄여야 마땅하다’고 태자에게 건의했다. 뿐만 아니라 고조와 태자가 죽은 뒤 문제에게도 여러 차례 건의했다.

문제는 오왕을 처벌할 수가 없어 조착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것을 기화로 오왕의 횡포는 날로 더해갔다.

문제가 죽고 태자 효경이 황제로 즉위했다. 조착은 어사대부로 승진하자 즉시 새로운 황제인 경제를 설득했다.

“옛날 고조께서 천하를 평정하셨을 무렵에는 형제분들도 적었고 자녀들도 모두 어렸습니다. 그래서 일족들을 왕으로 봉하셨던 것입니다. 후궁의 아들인 도혜왕을 제나라 칠십여 성의 왕으로, 이복동생인 원왕을 초나라 사십여 성의 왕으로, 형님의 아들 유비를 오나라 오십여 성의 왕으로 제각기 봉하시어 이 세 분에게 천하의 반을 주신 것입니다. 하오나 오왕 비는 태자와 사이가 벌어진 뒤부터 꾀병을 핑계로 조정에 협조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법에 의하면 죽을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고조께서는 벌하시기는커녕 도리어 궤, 장(공훈의 대신에게 내리는 궤와 지팡이)을 하사하셨습니다. 이렇듯 은혜를 입으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행동을 고치는 게 당연하거늘, 오왕은 더욱더 교만해졌으며 동산에서 돈을 만들고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어 부를 축적하는 한편 천하의 망명자들을 모아서 반기를 들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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