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은 도시의 경계이면서, 도성민의 삶을 지켜온 울타리다. 근대화를 거치면서 도성의 기능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한양도성은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발굴과 복원과정을 거치면서 잃었던 모습이 되살아나고 있다. 최근 한양도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무산됐지만, 서울시는 2020년 재신청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양도성은 시대를 이끌어왔던 정신적 가치가 담긴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연재기사를 통해 한양도성의 문화적 가치를 알아보고자 한다. 

 

▲ 한양도성박물관 안에 전시돼 있는 동국여도 도성도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서울은 온종일 바쁘게 돌아간다. 도시는 늘 바뀌고, 무언가 새롭게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서울의 전부는 아니다. 600년 두터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사문화도시. 한양도성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한양도성은 서울을 둘러싼 네 산을 따라 축조했다. 자연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합리적으로 빚어낸 걸작인 셈이다. 도성은 왕이 거처하는 성으로, 모든 국가 기능이 집중된 수도이기도 하다. 순우리말 ‘서울’은 수도(首都)라는 뜻이니, 도성이 곧 서울이다.

◆한양 도성 어떻게 만들었나

1392년 음력 7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무장(武將, 우두머리)과 관료들은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개창했다. 그 당시 새 왕은 ‘도평의사사(고려 후기 최고정무기관)’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라고 명한다. 반대하는 이가 적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왕은 “예로부터 새 왕조를 개창한 뒤에는 반드시 도읍을 옮겼다”고 강경히 주장해 그 뜻을 관철했다.

이에 곧바로 천도를 단행했으나, 궁궐과 성벽이 없는 곳에는 정무를 처리할 수 없었기에 곧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후 2년여 간 여러 군데의 후보지를 두고 새 도읍의 적지를 물색한다.

후보지로는 도라산, 무악, 적성 등 개경 인근 지역에서부터 멀리는 계룡산까지 꼽혔다. 하지만 한양보다 나은 곳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한양은 국토의 중심에 있고 강과 연결돼 수운과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또 행정력이 남북변방에 고루 미칠 수 있는 특성을 갖추고 있었다.

1394년(태조 3) 10월 25일, 조선왕조는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고 도시 건설 공사를 본격화했다. 새 도읍으로 정한 한양은 고려의 남경이었으나, 성벽조차 없던 곳이었다. 조선왕조는 이 땅의 자연현상을 따라 성벽을 쌓고 유교적 이상도시론에 맞춰 내부공간을 채웠다

성문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특별한 공간과 그 외부 사이의 접촉을 통제하는 시설이다. 도성을 빠져나가는 사람이나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 모두 성문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성문을 여닫는 리듬에 맞춰 하루하루를 생활했다.

한양 도성에는 8개의 문과 2개의 수문이 있는데, 동서남의 세 문은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취해 흥인문, 돈의문, 숭례문이라 이름 짓고 북문은 풍수지리설의 논리에 따라 숙청문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흥인문은 흥인지문으로, 숙청문은 숙정문으로 바뀌었다.

▲ 동대문 성곽 ⓒ천지일보(뉴스천지)

◆한양도성을 쌓은 사람들

양인은 국가에서 공물, 요역을 바쳐야 했다. 양인은 사대부와 천민을 제외한 자유민으로서 국가는 이들의 노동력에 의존해 유지됐다. 조세는 수확한 농작물 일부를 바치는 것, 공물은 지역 특산물을 바치는 것, 요역은 노동력을 직접 제공하는 거다.

요역 중 대표적인 것이 군역이었지만, 길을 닦는 치도역, 성을 쌓는 축성역 등도 종종 부과됐다. 한양도성 축성은 전국의 양인들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점검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1396년(태조 5)에는 경상, 전라, 강원과 국경 인근 지역을 제외한 서북면과 동북면 양인들을 1차에 11만 8070명,2차에 7만 9400명 동원했다. 경기, 충청, 황해도 양인들은 궁궐 건설을 맡았다.

1422년(세종 4)에는 전국에서 32만 2460명의 양인과 2211명의 공장(工匠, 장인)을 동원했다. 1704년(숙종30) 이후의 도성 수축공사는 도성 내외 군문(軍門)의 병사들과 임금 노동자인 모군들이 담당했다.

한양도성은 다양한 지형과 지질에 따라 서로 다른 축성기법을 사용했다. 무너진 구간을 보수할 때마다 진전된 기술을 도입했으니, 한국 축성 기술의 발전 과정을 아로새긴 문화유산이다. 또 출입, 보수, 관리, 순찰 등과 관련된 노동, 놀이, 예술의 배경이자 무대가 됐다.

서울이 팽창하기 시작한 뒤 성벽 주변에 생긴 마을들은 오래된 문화유산과 공존하는 현대적 생활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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