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종 총무원장 인공스님 인터뷰

▲ 24대 태고종 총무원장 인공스님 ⓒ천지일보(뉴스천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뉴스천지=송태복 기자] 태고종 박인공(70) 총무원장을 찾아간 날은 법정 스님이 입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스님은 불교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가 법정과 같은 스님을 내는 일이라고 했다. 불가에서도 세상이 본받고 추앙할 만한 인물을 내는 일은 쉽지 않은 듯했다.

스님의 나이 열세 살에 6.25가 터졌다. 인천에 살던 스님이 피난을 갔다 돌아왔을 때는 나이 열여섯이었다. 전란에 가족을 잃은 스님이 밥이라도 먹자는 심정으로 찾아간 곳이 봉원사였다. 열여섯 나이에 무슨 대단한 결심을 해서 승려의 길에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스님은 그것을 불가의 연이라 믿었다.

스님은 “그래도 불가에 귀의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고 왔으니 불가의 연이 닿았던 것 같다”고 했다. 불가에 귀의한 덕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스님은 “세상 법을 공부했는데 불법으로 먹고사니 참 묘한 인연”이라고 말했다.

인공(印空)이라는 법명은 영산재 전수자인 스승 남벽해스님이 지어주신 것이다. 글만 보면 허공에 도장을 찍는다는 뜻이지만, 불가에서 공(空)은 불자에게 수행의 목적인 만큼 ‘깨달음에 인을 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스님이 가장 좋아하는 경의 말씀도 반야심경 첫 구절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모든 유형(有形)의 사물(事物)은 공허(空虛)한 것이며, 공허(空虛)한 것은 유형(有形)의 사물(事物)과 다르지 않다)’이라고 했다.

스님은 부드러운 외모와 달리 “옳다고 믿는 것은 굴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성격”이라고 했다. 얼마 전 조계종이 56년 만에 태고종과 봉원사 소유권 분쟁에 합의하기까지는 인공 스님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목탁처럼 맑게 깨인 삶을 바라며
스님의 하루는 새벽 4시에 예불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잠은 바쁜 업무를 정리하느라 자정 이전에 자본 적이 없다”고 했다.

새벽예불은 목탁석(도량을 돌며 목탁을 두드리고 천수경 등을 외는 일)과 쇳송(종을 치며 진언(眞言)이나 법계(法戒)를 외우는 일)으로 시작한다.

목탁석과 쇳송의 의미를 묻자 “천지인 삼재(三才)가 열리는 시간에 모든 사물을 깨우는 것이며, 오행으로 보면 해가 뜨는 동쪽이 목(木)이 되며 해가 지는 서쪽은 금(金)이라 쇳소리보다는 나무소리를 먼저 내는 것이다”이라고 설명했다.

불가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하루를 시작하는 데는 특별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제멋대로 살며 계율을 어기다가 마침내 죽어 큰 물고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 물고기의 등에는 커다란 나무가 솟아나 이 물고기를 고통스럽게 했다.

특히 풍랑이 칠 때는 더욱 많은 고통을 받아야 했다. 나중에 스승의 도움으로 물고기 몸을 벗은 제자는 수행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경각심을 일으킬 수 있도록 자신의 등 위에 난 나무를 잘라 물고기 모양의 목어를 만들어 울려 줄 것을 스승에게 간청했다.

이 목어에서 변형된 것이 바로 목탁이다. 목탁은 수행자들이 잠을 자면서도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언제나 맑게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교리 알고 행해야 참 종교인
스님에게 평소 불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강조하는지 물었다. 스님은 늘 “신(信) 해(解) 행(行)을 강조한다”고 했다. 특히 “종교인이 교리를 알지 못하면 행하는데 한계가 있다. 진짜 종교인이 되려면 자기 종교의 경서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먼저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종교의 주인을 믿어야하고, 둘째는 경서의 교리를 알아야 하며, 아는 것을 행해야 그 도가 완성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도를 행하는 자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며 “법정스님이 세인에게 남긴 무소유도 곧 공(空)이요, 불가의 가장 본질적인 정신이다. 경서의 말이 사람 속에 스며들려면 법정처럼 행해야 한다. 말은 삶의 족적으로 남을 때 비로소 세인을 감동 시킨다”고 했다.

스님은 “성철스님이 남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라는 말도 불가에서 원래 전해지는 말이지만, 성철스님이 했기에 명언이 된 것’이라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종교의 힘은 그 말을 행하는 종교인에게서 비롯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신앙인이라면 세상 사람보다 나아야 하고, 낫게 살려면 경서의 교리를 알아야 각(覺)을 이룰 수 있다”며 앎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영산재ㆍ단청은 정통불교의 증거
태고종은 고려시대 태고 보우국사를 종조(宗祖)로 하며, 종파적 색채를 지양하는 통불교(通佛敎)사상과 원융(圓融)정신의 실천을 근본으로 삼은 종단이다. 한국불교의 시작은 태고종이라 할 수 있다.

태고종은 승려의 결혼을 자율에 맡긴다. 이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가장 큰 차이점이자 태고종이 조계종으로부터 독립한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스님은 태고종을 탄압한 과거 정권이야기와 그로인해 조계종과 분리돼 오늘에 이른 사연을 오랜 시간 들려줬다.

1954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이 결혼한 스님은 다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특별담화 이후 조계종은 독신을 주장하는 세력과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다 5.16 혁명 후 불교재건위원회에 의해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통합종단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중앙종회 구성에 대해 쌍방 이견 대립이 일어나면서 태고종은 1970년 1월 박대륜(朴大輪) 종정(宗正)을 중심으로 통합종단에서 독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스님은 태고종의 자랑거리로 한국불교의 전통문화인 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와 제48호 단청을 들었다. 영산재는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 인도 영취산(靈鷲山)에서 석가모니 부처가 여러 중생(衆生)이 모인 가운데 법화경(法華經)을 설(設)할 때의 그 모습을 시공을 초월하여 재현한 불교의식이다.

영산재는 지난 해 9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국내 종교행사를 넘어 세계적 문화유산으로써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올해 영산재는 ‘G-20정상회의 성공개최를 기원하는 2010영산재’로 개최 돼 호국불교 태고종의 면모를 보여줬다는 평가다.

스님은 “이런 전통문화가 태고종에 남아있다는 건 태고종이 한국의 정통 불교라는 증거”라고 힘주어 말했다.

인공스님 취임 후 태고종은 내부화합과 조직정비를 통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의 정통 불교라는 강한 자부심과 함께 새로운 중흥을 꿈꾸는 태고종이 세상을 새롭게 깨우는 목탁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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