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북한산을 진산으로 하고 북악·남산·인왕산·낙산 등 크고 작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또 산줄기를 뻗어 내리는 지형상 많은 고개도 있었다. 고개는 옛날부터 백성들의 교통로였다. 또 고개마다 다양한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 조상들의 애환과 삶, 숨결이 전해오고 있는 고개 속에 담긴 이야기를 알아봤다.

 

▲ 1960년대 무악재 고개와 현재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인왕산과 안산 사이 위치한 고개
교통의 요충지, 청나라 사신도 오가
호랑이 출몰에 행인 10명 모여 넘어

‘모래재, 길마재, 추모현, 모화현…’
고개는 하나지만 이름, 사연 많은 곳

“조정 신하 당파 지어 동서로 나뉠 징조”
명종 때 남사고 예언 적중하기도 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무악재(毋岳─)’. 이 고개처럼 많은 이름과 사연을 간직한 곳도 없을 거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과 서대문구 홍제동 사이를 잇는 고개. 해발 338.2m의 인왕산과 해발 295.9m의 안산 사이에 위치한다.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의주를 비롯해 한양에서 황해도, 평안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청나라 사절단이 들어오는 길목의 관문구실을 했고, 이 고개 아래 현저동에는 영취락이 발달했다.

◆험한 산세 이루던 고개

인문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에는 무악재에 대한 기록이 잘 남아있다.

“무악은 인왕산에서 서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추모현을 이루고 솟은 산으로, 한 가닥은 남쪽으로 뻗어 약현과 만리재가 되어 용산까지 갔고, 다른 한 가닥은 서남쪽으로 뻗어 계당치까지 이른다.”

곧 인왕산에서 한 뿌리가 서쪽으로 추모현 곧 무악재를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예전에는 좁고 가파른 매우 험한 고갯길이었다. 성종 19년(1488) 명나라 사신인 동월(董越)이 지은 ‘조선부(朝鮮賦)’에는 무악재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천 길의 험한 산세를 이루었으니 어찌 천명 군사만을 이기겠는가. 서쪽으로 하나의 관문길을 바라보니 겨우 말한 필만 지날 수 있겠다.”

그 주석에는 “홍제동에서 동쪽으로 가다가 5리도 못 되어 하늘이 관문 하나가 북으로 삼각산을 잇대고 남으로 남산과 연결되어 그 한가운데로 말 한 필만 통할만 하여 험준하기가 더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당시 무악재의 험준한 모양을 짐작할 만하다.

험준한 고개라 보니 무악재는 호랑이가 많이 출몰하는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조정에서는 이 호환을 막기 위해 지금의 서대문 독립공원 자리에 군사를 주둔시켜 행인 10여명이 모이면 앞뒤로 호위해 보호해 줬다고 한다. 사람을 모아 넘는다 하여 이 고개를 ‘모아재’라고 불렀다.

▲ 1907년 무악재 고개(제공: 정성길 명예박물관장)

◆사연도, 이름도 많은 무악재

무악재는 사연이 참 많은 고개다. 그래서일까. 무악재, 모아재 뿐 아니라, 모래재, 길마재, 추모현, 모화현, 봉우재 등 이름이 많았다.

먼저 이 고개 이름을 무악재라고 부르게 된 것은 조선 초기에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는 데 공이 컸던 무학대사(無學大師)의 ‘무학’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는 모래재 또는 사현(沙峴)이라고 불렸다. 고개 북쪽 지금의 홍제동 언저리에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현사(沙峴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연유됐다고 한다.

길마재라는 이름은 무악이 두 개의 봉우리로 돼 있어서 멀리서 보면 두 봉우리 사이가 잘록해 마치 말안장 같이 생겼기에 말안장 곧 길마재라 하고, 한자로 안현(鞍峴)이라 했다.

▲ 무악재 표지석 (출처:서울사진아카이브)

명종 때 풍수지리가이며 예언가인 남사고는 이같이 말했다. “서울 동쪽에 낙산이 있고 서쪽에 안산이 있으니, 말과 그 안장이 같이 있지 않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 형국이다. 앞으로 조정 신하들이 당파를 지어 동·서로 나뉠 징조이다. 동쪽 낙산의 낙(駱)자는 곧 각마(各馬)가 되니 동인은 서로 갈라지게 되고 서쪽 안산의 안(鞍)자는 혁안(革安)이되니 서인은 혁명을 일으킨 후에 안정될 것이다.”

과연 그의 글자 풀이대로 당시 동인과 서인이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서인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후 오랫동안 정권을 잡게 됐다.

또 이 고개는 ‘추모현’이라 불렸다. 영조 45년(1769)에 영조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용두리에 조성하는 부왕 숙종의 명릉 역사를 마치고 한성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때 이 고개에서 명릉 쪽을 바라보며 부왕의 생전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추모했다 하여 고개를 추모현이라고했다.

또 홍제동 쪽에서 이 고개를 넘으면 중국의 사신이 머물던 ‘모화관’이 있어 이 고개를 모화현이라 불렀다. 또 산꼭대기에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고도 불렸다.

이처럼 고개는 하나지만 다양한 이름이 있는 건 그만큼 사연이 많은 고개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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