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세풍(稅風), 안풍(安風), 병풍(兵風) 중에 병풍이 가장 힘든 바람이었다.”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씨가 남긴 씁쓸한 술회다. 세풍은 1997년 대선 때 국세청 간부가 대선자금 모집에 관여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안풍은 1996년 안기부 예산이 총선 자금으로 살포된 의혹이 제기된 사건이었다. 이회창씨가 가장 난코스였다고 언급한 게 병풍. 회고하자면 쓴웃음이 절로 나는 사건이다. 병풍 사건은 1997년 15대 대선과 2002년 16대 대선 때 잇따라 터졌다. 결정적인 순간에 두 차례나 일어나 대선판을 뒤집었다. 최고의 네거티브로 불리는 병풍, 그 악역의 주인공이 김대업씨였다. ‘대쪽 이미지’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새정치민주연합 김대중 후보가 격돌한 15대 대선 막판 그가 돌연 등장했다. 두 아들이 체중 미달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이 후보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이 후보는 극력 해명했으나 패배했다. 김씨는 이어 16대 대선에서 녹취록을 들고 나와 또다시 바람을 일으켰다. 녹취록은 ‘판독 불가’ 및 ‘위조’로 판명났다. 하지만 선거판을 뒤엎은 일진광풍이 이미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가 버린 뒤였다. 이로 인해 지지율이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많이 앞서나가던 선거전에서 이 후보는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김대업씨는 선거가 끝난 뒤인 2004년 수사관 자격 사칭과 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1년 10월의 형을 받았다. 하지만 선거결과는 번복되지 않았다. 재판과정에서 당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그는 인정했지만 벌써 버스 떠나고 난 뒤여서인지 병풍사건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2007년 대선의 BBK, 2012년 이정희 후보의 TV토론 십자포화도 기억난다. 북풍(北風)이나 색깔론도 넓은 의미에서 네거티브다. 97년 대선에서 북한 측에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해 빚어진 총풍(銃風) 사건 등은 북풍의 일환이었다. 네거티브. 선거 때 후보의 불법, 부도덕, 이성문제, 돈 문제 등 엽기적이고 패륜적인 것을 끄집어내 터뜨리므로 폭발성이 크다. 그래서 후보들은 포지티브보다는 인신공격에 집착해 상대방을 흔들고 흠집 내며 몰락시키려 한다. 문제는 악랄한 조작증거, 가짜뉴스의 폐해. 상대 후보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히지만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어렵고 선거불복에 따른 정치적 부담으로 인해 선거결과는 불가역적인 경우가 많으니 당사자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올해 대선도 볼썽사나운 네거티브로 얼룩져 국민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갑철수론, MB아바타론, 문재인 후보 아들 취업 의혹, 홍준표 후보 돼지발정제 고백 논란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네거티브들이 생산되고 있다. 제기하는 측에서야 심각할 수도 있으나 대체로 유권자가 검증해야 할 정책·비전과 상관없는 것들이다. 문모닝, 안모닝이라는 말까지 있다. 또다시 네거티브를 터뜨리고 네거티브를 방어하는 데 집착하다 하얗게 날을 새는 이전투구 선거전이다. 망국적인 댓글폭탄 부대를 해산시키지 않은 채 이번에도 선거가 치러지고 있지만 네티즌들은 알고도 속는다. 인신공격이 난무하는 통에 극심한 정치혐오증으로 기권 유권자도 늘 것 같다는 전망이다. 사실이라면 우리에게는 또 민주주의의 제도적 왜곡이라는 비극이 주어질 뿐이다.

송민순 회고록·쪽지 논란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발단은 분명 네거티브의 범주에 들어간다. 처음엔 많은 이들이 ‘또 북풍인가’ 하며 애써 외면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의 대응이 오락가락했다. 노무현 정부 대북정책을 계승한 정당이라면 좀 더 당당했어야 했다. 남북정상회담 직후였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는 견해를 애초부터 내놨어야 했다. 2007년 당시 문 후보가 직접 주관한 일도 아니었다. 얼버무리거나 반문하는 식으로 넘어갈 게 아니라 집권하면 북한에 사전문의해보고 결정하는 그런 구차한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하며 국민을 안심시키는 게 더 좋았다. 국민 앞에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둔 남북대치상황이라는 엄혹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유권자들이 다 아는 네거티브라고 해도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면 독이 되고 상처입기도 한다. 안보도 그렇고, 경제정책도 마찬가지다. 후보의 올곧은 독트린에 대해서는 국민이 표로써 판가름해준다. 이제부터라도 과거보다는 미래, 네거티브보다는 건전한 정책 비판이 중심이 되는 알맹이 있고 성숙한 끝장토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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