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대학교에선 교수가 강의를 일방적으로 할 때보다 학생들로부터 과제를 받거나 토론을 할 때 유익한 경험을 하는 경우가 많다. 교수들이 지식과 정보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학생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취업 문제, 학업 문제, 가정 문제 등 요즘 학생들은 각 개인별로 한두 가지 문제가 없는 이들이 없다. 체육특기자의 경우 학업 문제가 가장 심각한 고민거리이다.

지난해 2학기에 이어 이번 학기에 축구를 하는 체육특기자 학생이 필자의 과목을 연이어 수강했다.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학사특혜문제가 불거진 이후 체육특기자에 대한 학점제도가 강화되면서 이 학생은 예년보다 훨씬 많이 강의에 출석해야 했다. 새벽훈련과 야간훈련의 횟수를 늘리면서 신청한 강의과목은 빠지지 않고 졸린 눈을 비비면서 수강하는 게 그의 요즘 일상이다.

필자는 다른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이 학생에게도 ‘가장 잊을 수 없는 스포츠에 대한 추억이나 경험’을 에세이 형식의 과제로 발표하도록 했다. 그는 엘리트 스포츠 선수로서 겪고 있는 어려움과 생각을 그동안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면서 솔직하게 털어놨다. 내용은 가슴이 저리면서도 따뜻한 공감을 느끼게 했다.

그는 “13년간의 경험 중 가장 의미 있고 영향력 있었던 경기를 꼽으라면 선택할 자신이 없다. 숱하게 지고 깨지고 패하던 나날들마저 내게는 소중한 경기였고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그 무엇보다 잊지 못할 경험이 있다면 처음으로 축구공이 내 발에 닿는 순간이었다. 뻔한 대답일 수도 있으나, 언제쯤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그 찰나의 ‘즐거움’은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아쉬울 만큼 크게 다가왔다. 공이 내 발에 닿는 순간들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곤 했다”며 현재 선수를 이어가게 한 원동력이 운동을 하면서 얻는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그는 축구를 해왔던 13년 동안 어릴 적 느끼고 꿈꿔온 ‘즐거움’보다는 고뇌와 인내, 부상 같은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느끼는 일이 훨씬 많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꿈을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작은 찰나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이기지 못할 상상을 넘어설 때 오는 ‘즐거움’. 노력이 실력으로 변함을 몸소 느끼는 ‘즐거움’. 심지어 경쟁자에게 졌음을 깨끗하게 인정할 때마저 그 속에 ‘즐거움’이 있다. 이 감정을 ‘즐거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 처음 공이 발에 닿던 순간 찰나에 찾아왔던 작은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나는 여전히 많은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 비단, 이것은 축구뿐만 아니라 모든 스포츠인이 스포츠를 하는 이유이자 스포츠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를 비롯한 운동선수들이 부딪치는 현실은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 우수한 성적과 뛰어난 재능에 열광하고, 스포츠가 내포하고 있는 수많은 의미와 힘을 상업적으로 먼저 생각하며, 개인의 사익을 위해 스포츠를 교묘하게 이용해 스포츠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같은 합숙소에서 운동을 하다 원활한 학습환경을 만들기 위해 지방분교로 새 둥지를 옮겨간 야구부가 떠난 지하야구연습장에서 중학교 야구선수들이 개인 레슨을 받기 위해 부모님에 이끌려 연습하는 광경을 지켜본 경험을 소개했다. 중학생 야구선수들의 표정은 야구를 즐기는 모습이 아니었다. 장시간 무릎을 꿇었던 것이 고통스러웠는지 얼굴은 찌그러져 있었고, 하물며 구석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는 선수도 있었다. 그날 그가 본 야구는 야구가 아닌 노동이었고 또 한번 스포츠가 어린 선수들로 하여금 가치를 잃는 순간이었다고 했다. 성적 지상주의에 빠진 어린 선수들이 스포츠를 즐거움과 꿈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두려웠다고 했다. 스포츠를 너무 현상적이며 이해 타산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본질적인 의미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즐기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기술적인 혁신이 이루어지며, 스포츠도 많은 발전을 보이고 있으나 정작 스포츠의 참된 가치는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포츠가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를 빚는 단초를 제공했던 만큼, 필자를 비롯한 체육학계 관계자들에게 그의 목소리는 제자가 스승보다 낫다는 의미인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며 반성의 시간을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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