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926년 2월 18일 이완용의 영결식 날, 장례 행렬은 화려했다. 이날 오후 4시에 이완용의 시신은 종로구 옥인동 집에서 영결식장인 용산으로 향했다. 맨 앞에는 기마 순사가 서고 그 뒤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2위 대훈위 후작 이공지구’라고 적힌 붉은 명정이 휘날렸다. 

명정에 쓸 직함이 많아야 양반이라던 시절에 이완용의 유족들은 대한제국 총리대신을 비롯한 그 많은 직함을 다 물리치고 오로지 일본 천황이 준 벼슬만 명정에 쓴 것이다. 이완용은 죽어서도 일제에 충성한 것이다. 뼛속까지 친일파였다.  

명정 다음에는 일본천황과 순종 등이 보낸 조화행렬이 이어지고, 갖가지 훈장들이 친척들의 손에 들려 줄을 이었다.

이어 기마 순사들의 호위 아래 이완용의 시신을 실은 마차가 따르고 상주들이 뒤따랐다.  

무엇보다 장례 행렬의 압권은 조객(弔客)들의 인력거 행렬이었다.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천여명의 조객들이 저마다 인력거를 타고 뒤를 따르니 장례 행렬은 옥인동에서 광화문통까지 10여리에 걸쳐 이어졌다. 

이 장례 행렬을 보려고 구경꾼까지 몰려들어 이완용의 장례는 고종의 국장 이래 최대의 인파가 운집한 일대 장관을 연출했다. 

당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문은 ‘생전 영예가 사후에 잇는 대장의(大葬儀)’라고 표현했다. 일제는 이완용의 장례식 전체를 기록영화로 만들었다. 친일세도가의 화려한 장례식 광경을 일반에 보여줌으로써 ’사회교화‘의 자료로 삼기 위함이었다. 

이완용의 장례 행렬은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서울역 앞을 거쳐 용산의 영결식장에 도착했다. 용산의 영결식에서는 박영효가 장의부위원장으로서 조사를 낭독했다. 조사에 이어 일본 천황의 칙사를 선두로 사이토 총독 등의 분향이 끝나고 이완용의 시신은 오후 6시 25분에 용산역에서 특별열차에 실려 장지인 전북 익산으로 향했다.  

이완용의 시신은 다음 날 오전 6시 반에 강경역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조선식 상여로 30리 떨어진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선인봉 장지에 이르렀다. 묘지터는 이완용이 전라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진주의 유명한 지관이 잡아둔 명당이었다.  

그런데 이완용이 죽은 지 4개월도 안 되어 이완용의 묘지기 집에 세 명의 강도가 들어 쌀을 훔치는 일이 발생했고, 누군가 봉분을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자 익산경찰서는 묘지에 순사를 배치하는 소동을 벌였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이완용은 죽어서도 일본 순사의 보호를 받는다”고 빈정댔고, 동아일보는 “문제가 공동변소로부터 무덤으로 옮아가는 것인가”라고 했다. 경성의 공중변소를 ‘이박 요릿집’이라고 비아냥거렸던 조선인들이 이제는 이완용 묘를 파헤치는 것으로 화풀이 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이완용가의 부귀영화도 막을 내렸다. 온 국민으로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을 들은 이완용의 후손 이병길 의 집은 돌팔매질 당했고, 이병길은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돼 재산의 절반을 몰수당했다.   

1979년에 이완용의 묘는 증손자 이석형에 의해 파헤쳐져 유골은 화장되고 집안은 멸문의 화를 입었다. 소풍 나온 초등학생들까지도 매국노 이완용의 묘를 짓밟자 이석형은 폐묘(廢墓)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한 것이다. 당대의 지관이 고른 천하의 명당이라도 친일 매국노라는 평가 앞에 무슨 소용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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