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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90% 한양 도성 안 거주
인구과밀화, 주택 문제 발생해

동대문·수구문 밖 동네 정한 후
집 없는 사람에게 주기를 청해

집짓기를 청원한 후 3개월 안에
허가 문서 안 받으며 청원 취소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전하, 새 집터가 필요하옵니다.”

도심 발달로 인한 인구 수 증가는 주택문제로 이어진다. 땅은 정해져 있는데, 인구는 점점 더 늘어나니 제집을 마련하는 것은 참 어렵다.

조선시대에도 그랬다. 옛 기록에 의하면 한성부 전체 인구의 90%가 도성 안에 살았다고 한다. 나머지 10%가 사는 도성 밖의 행정구역은 이름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당시 한양에 살던 인구수는 얼마였을까. 1428년(세종 10)에 조사한 한양의 인구통계에 따르면, 10만 900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구를 파악하다 보니 인구통계에 누락이 많았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17세기 중반에는 20만명을 넘기도 했다. 이 같은 인구 과밀화 현상은 주택 문제를 일으켰다.

◆세종 6년, 인구과밀화 현상 발생

실제로 세종 6년(1424)에 한양에서는 인구과밀화와 택지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이에 한성부에서는 도성 안에 새로운 집터를 설정할 것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도성 안에 사람은 많고 땅은 비좁아서 대체로 집터를 받고자 하는 자는, 딴 사람이 일찍이 받은 땅을 혹 빈 터라 하며 혹 집 짓고 남은 땅이라 하여, 온갖 방법으로 다투어서 송사가 끊어지는 날이 없습니다. 남대문 바깥 반석방과 반송방의 예에 의거해, 호조와 함께 살펴 범위와 동네 이름을 정해서 집 없는 사람에게 떼어 주기를 청합니다.”

이후 한성부에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을 임금에게 보고한다.

“동대문 밖과 수구문 밖의 개천 하류 이북의 땅을 동부(東部)에 부속시켜 이방(二坊, 행정구역 명칭의 하나로 현재의 면에 해당)으로 나눠 숭신·창인이라 이름하고, 이남을 남부(南部)에 부속시켜 또한 이방으로 나누어 예성·성신이라 이름하고, 집터를 원하는 자는 규정에 의하여 분할하여 주소서.” 이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개월 안에 집 짓지 않으면 청원 취소

집짓기를 청원하고도, 허가 문서를 받지 않는 경우도 발생했는데, 이 경우 국가에서는 행정 처리에 골머리를 앓았다. 세종11년 3월 11일, 한성부에서 이같이 아뢴다.

“빈 땅에 집을 짓겠다고 청원한 자가 여러 달 되어도 허가한 문서를 받지 않고 있다가 다른 사람이 다시 청원함에 미쳐서는 대개가 먼저 신고를 냈다고 말을 하오니, 청컨대 지금부터는 청원한 후 3개월이 지난 자는 집을 짓지 않는 것으로 인정하는 예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옮겨 주게 하소서.”

이에 세종은 집짓기를 청원하고 3개월 간 집을 짓지 않으면 청원을 취소하도록 했다.

◆신분에 따라 집 크기도 차이

조선시대에는 집 크기가 신분에 따라 차이가 났다. 신분에 따른 건물의 제한을 알리는 ‘가사규제’가 1431년(세종 13)에 제정된 탓이다.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대궐은 제한을 두지 않으며 대군의 경우 60칸, 군과 공주는 50칸, 옹주나 종친 및 2품 이상관리는 40칸, 3품 이하는 30칸, 일반 백성은 10칸으로 주택 규모가 제한됐다. 일반 백성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지배층과 같은 집을 지을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제한 제도였다. 이후 건축 재료 크기 등을 보완하기도 했다.

사실 가사규제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오랜 전통이었다. 이에 가난한 보통사람의 집을 뜻하는 ‘초가삼간’이라는 옛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초가는 지배층의 기와집의 상대어이고, 삼간은 그 이상의 여러 칸 혹은 수십 칸에 대한 상대어인 셈이다. 집이 비록 작을지라도, 제집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날이지만, 우리네 삶의 모습과 비슷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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