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1394년, 명태조 주원장(朱元章)은 궁전에서 잔치를 열었다. 태자태사 부우덕(傅友德)도 참석했다. 마침 그의 두 아들 부마도위 부충(傅忠)과 금오위진무 부양(傅讓)은 당직근무 중이었다. 연회가 열리기 전 주원장은 궁을 순시하다가 부양이 활주머니를 차지 않는 것을 보고, 오만하고 예의가 없다고 책망을 했다. 부우덕이 대신 사죄하려고 일어났다. 그러나 주원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두 아들의 상황이나 알아보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대전을 나가기도 전에 두 아들의 수급을 가져오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황급히 달려가 두 아들의 수급을 들고 대전으로 왔다. 주원장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참혹한 짓을 저질렀는가? 짐에게 원한이라도 품었는가?”

망연자실해진 부우덕은 현장에서 자결했다. 부우덕을 죽이려던 주원장은 구실을 찾지 못하자 사소한 일을 키웠다. 화살주머니를 차지 못했다면 부우덕이 아들을 데려와 사죄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변명할 기회는 주지 않았고 심하게 책망했다. 부우덕이 나가자 주원장은 두 아들의 수급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부우덕이 예상대로 두 아들의 수급을 가져오자 이번에는 아들을 잔인하게 죽인 것은 군주에게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몰아세웠다. 자기 아들을 죽일 아버지가 있겠는가? 주원장의 공갈에 넘어가 아들을 죽이고 군주에게 잔인하다는 죄를 씌웠다는 죄목이 추가됐다.

탁발승이었던 주원장은 하루아침에 황제가 됐다. 부우덕은 1361년에 주원장의 부하가 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주원장도 그의 공을 으뜸으로 인정했다. 정권이 확립되자 주원장은 공신들에게 위협을 느꼈다. 공신들을 미리 제거하지 않으면, 자기의 후손이 국가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처음 타도대상은 노골적으로 세력을 강화하던 이선장(李善長), 호유용(胡惟庸) 등 회서(淮西)그룹과 유기(劉基) 등 절동(浙東)의 명사호족세력이었다. 주원장은 이들에게 절제를 요구했다. 홍무 5년, ‘철방문(鐵榜文)’을 반포해 공신들의 권한을 제한했다. 다음해, ‘대명률(大明律)’을 반포해 법치를 강화한다는 것을 명확히 선포했다. 이어서 탕화(湯和)를 본받아 무장을 해제하고 전원으로 돌아가 부귀를 누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별다른 반응을 없자 주원장은 초조해졌다. 강력한 조치가 필요했다. 

1380년, 좌승상 호유용(胡有庸)이 개인적인 구설수로 처형됐다. 10년 후, 수임승상이자 개국1등공신 이선장도 다른 마음을 품었다는 이유로 살해되고, 그의 가족 70여명도 연좌돼 모두 죽었다. 열후로 봉해졌던 육승정(陸勝亭), 당승종(唐勝宗), 비취(費聚), 주량조(朱亮祖) 등도 연루돼 살해됐다. 죽은 사람이 300명을 넘었다. 1393년, 주원장은 다시 대규모 옥사를 일으켜 양국공 남옥(藍玉)과 열후 장익(張翼)을 죽였으며, 이 사건에 연루돼 죽은 사람은 무려 1만여명이나 됐다. 대규모 옥사로 대부분의 공신들이 제거됐으나, 부우덕은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이선장이 피살된 후에도 부우덕은 수많은 전공을 세워 다시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1년 후 주원장과 사이에 모순이 발생했다. 1392년, 부우덕은 관전을 농장으로 사용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주원장은 거절하고 심하게 나무랐다. 늘 부우덕과 함께 출정했던 정원후 왕필(王弼)이 찾아왔다. 부우덕은 절친한 전우인 그에게 불평을 터트렸다.

“황상은 춘추가 높아지더니 희로가 오락가락하네. 도대체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으니 우리가 언제 일을 당할지 알 수가 없다. 우리의 말로가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스럽소.”

담벼락에도 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의 대화가 주원장의 귀에 들어갔다. 부우덕이 주원장에게 죽은 것은 결국 자신이 자초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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