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기며

이석란

 

철커덕 철커덕 바다는
푸른 문장으로 넘치는
파도를 인쇄 중이다

빛바랜 원고지가 쌓여
해안가 절벽을 이루고, 그 아래
햇빛에 잘려 부서지는 파지(破紙)

가끔 고깃배가 지우는 문장도 있지만

동서고금의 베스트셀러
저 대하 장편 소설을
쓰는 이는 누구일까?

바닷가에 서면
바다는
내 이야기를 받아 적는다

 

[시평]

파도가 밀려오고 또 밀려가는 바다를 바라다보면, 마치 바다는 쉼 없이 수많은 사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그래서 그 수많은 이야기들을 파도는 마치 철커덕 철커덕 인쇄를 해 내듯이 우리의 앞에서 철석이고 있다. 푸른 문장을 넘기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찍어내는 바다의 그 수많은 이야기들. 

그래서 누구나 바다 앞에 서면 수많은 이야기의 사연을 듣는 듯하다. 아득히 보이는 저 수평선에서부터 아득히 밀려왔다가는 이내 다시 밀려가버리는 수많은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 속에서는 우리들의 많고도 많은 사연들이 담겨져 있는 듯도 하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넓고 넓은 바다, 그 앞에 서면, 동서고금의 베스트셀러, 저 대하 장편 소설. 온종일 읽고 읽어도 결코 지치지 않는 그 많고 많은 이야기들. 오늘도 우리는 세상이라는 드넓은 바다, 그 앞에 서서, 넘실대는 바다의 푸른 물결의 그 파도보다 더 많은 세상의 이야기들, 그 이야기 속을 헤쳐 나가고 있구나.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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