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부터 사람은 강에 의존하며 살아왔다. 오늘날 강 주변으로 옛 유적이 발견되는 것은 강이 식생활의 중요한 장소임을 보여준다. 서울의 한강도 마찬가지다. 한강 주변에서 발견된 유적은 여러 시대를 담고 있다. 이는 한민족의 인류사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이와 관련, 한강유적에 담긴 삶을 알아봤다.

 

▲ 사육신역사관에 전시된 사육신 모형 ⓒ천지일보(뉴스천지)

어린 단종 복위 도모하던 사육신
계유정난으로 왕 된 세조 제거 실패
밀고로 계획 들통 나 목숨 잃게 돼

숙종 때 추모 위한 민절서원 세워져
충절정신 기리기 위한 사육신공원 조성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이요. 결의와 지조를 지킨 ‘사육신’.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바친 이들의 묘가 서울 한강변에 있었다.

◆오가는 시민 충절 기려

서울 동작구 노량진역 2번 출구에서 약 2㎞ 거리에 위치한 사육신묘는 시민 누구나 오가며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돼 있었다. 곳곳에 핀 봄꽃은 해마다 사육신묘를 지켜주고 있는 듯했다.

사육신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명이다. 충효를 지킨 분들을 모신 장소가 모두 그러하듯, 사육신묘가 있는 사육신공원 입구에도 홍살문이 서 있다. 홍살문을 지나 언덕에 오르면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祠)가 있었다.

이곳을 오가며 충절을 기리는 시민들의 표정은 엄숙해 보였다. 경건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기도하는 시민들. 저마다 깊은 깨달음을 지닌 듯 보였다. 의절사 뒤편으로 사육신묘가 모셔져 있었다. 이들 사육신은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한 걸까.

▲ 불이문에서 바라본 의절사 ⓒ천지일보(뉴스천지)

◆어린 단종 복위 도모한 사육신

조선 왕조의 제4대 임금인 세종 대에는 조선 왕조의 태평성대를 이뤘다. 세종이 재위 32년(1450)만에 세상을 떠나고 세자인 문종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2년 3개월 만에 문종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문종의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세자 단종이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단종이 왕이 되자 조정에는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불안감은 곧 현실이 됐다.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과 황보 인, 김종서 등을 숙청하고 권력을 독차지했다. 그리고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에 사육신은 동조자들을 모아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1456년 6월, 이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운검’을 하게 되는 것을 기회로 세조(수양대군) 일파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운검은 취소되고 실행이 미뤄지게 된다.

▲ 사육신 위패 모셔진 의절사 ⓒ천지일보(뉴스천지)

이후 집현전 출신인 김질(金礩) 등은 뒷일이 두려워 세조에게 단종 복위 음모를 일러바쳤고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직접 이들을 심문했다. 이때 주모자 중 남자는 모두 처형됐고, 여자들은 노비가 됐다.

◆숙종 때 민절서원 세워지기도

사육신의 충절과 그 외로움을 추모해 1691년(숙종 17) 이곳에 민절서원이 세워지게 된다. 1782년(정조 6)에는 무덤 곁에 비석을 세웠다.

세조 당대는 물론 그 후에도 오랫동안 사육신묘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러다 1614년에 나온 ‘지봉유설’에서 이수광은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빌려 노량진 육신묘를 언급했다. 이수광은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3인의 묘가 있다고만 기록했다.

▲ 사육신묘 ⓒ천지일보(뉴스천지)

이후 1650~1679년 사이에 박팽년의 후손 박숭고의 노력으로 노량진 육신묘가 재정비되고 국가의 인정도 받게 됐다. 하지만 사육신 가운데 유성원, 하위지의 묘는 이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어서 재정비할 때 함께 정비하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 이후 1950년대까지 무덤과 비석 등이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다가 1972년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의 4개의 묘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1977~1978년에는 서울시의 사육신묘 정화사업 때 하위지와 유성원의 가묘가 조성됐다. 또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 모의를 추진한 김문기의 가묘도 조성됐다.

이렇게 조성된 사육신묘는 오늘날 당시의 역사를 대신 알려주고 있었다. 비록 이들의 단종 복위 계획은 실패했지만, 충절은 영원한 듯 보였다. 한강이 계속 흐르듯, 바람이 끊임없이 불 듯, 이들의 역사도 그렇게 전해지는 듯했다. 

▲ 사육신공원에서 바라본 한강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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