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봉 대중문화평론가

누구세요? 어느 날, 나에게만 그녀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누군가에 보이지 않는 대상이 나에게만 보인다면, 또 반대로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하는데 그 사람만 나를 확인할 수 있다면, 당사자에게 어느 날 새로운 세상이 느껴질 것이다.

아내가 죽은 후 삶의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보험회사 과장 강수. 회사로 복귀한 그는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여자 ‘미소’의 사건을 맡게 된다. 강수는 사고 조사를 위해 병원을 찾아가고, 그 곳에서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 ‘미소’를 마주한다.

“제가 보여요?” 어느 날, 새로운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 속 남녀는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보험회사 직원과 보험 청구인 관계다. 보험회사는 보험 청구인의 요구를 어떻게든 묵살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현실화시키라고 강수에게 지시한다. 강수는 돈으로 목숨 값을 흥정하는 비인간적인 현실에 실망하고 혼수상태인 미소가 직면한 현실과 불쌍하게 생을 마감한 자신의 처를 오버랩하면서 흔들린다.

보험회사 직원인 강수는 자신의 본분을 잊은 채 죽음과 삶, 억울한 죽음과 불운한 상황에 직면한 이들의 현실을 고뇌하며 사망한 아내에 대한 회상을 통해 그리움과 미안함을 전달한다.

오로지 액션과 코미디를 지향하며 돈에 연계된 상업영화에만 몰두하는 충무로 현실에 영화 ‘어느 날’은 우리가 쉽게 잊고 인지하지 못한 잔잔한 사랑과 추억, 무엇이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다. 또한 단순히 두 남녀에 대한 로맨스에 집중한 일반 드라마와 달리, ‘어느 날’은 판타지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삽입하며 일상에서 체험하는 미묘한 감정과 더불어 섬세한 연출을 선보였다.

이윤기 감독은 ‘남과 여’ 등 기존 작품들에서 미장센과 둘만의 남녀이야기에 많은 집중을 했다면, 이번 작품은 인물 간 갈등의 폭을 줄이며 영혼이라는 새로운 키워드와 판타지를 결합시켜 관객에게 위로와 위안을 제공한다. 이 작품은 큰 규모의 스케일로 거창하거나 급히 흘러가는 스토리텔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연민의 정을 느끼고 공감하고 여운을 가질 수 있는 상업영화보다 독립영화에 가까울 수 있다. 남녀의 가녀린 감성과 함축적 대사, 강원도 고성의 아름다운 해안가를 배경으로 한 미장센, 오랜 시간 동안 장면을 놓고 관객이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잔잔한 메시지를 던진다.

할리우드 영화 ‘사랑과 영혼’, 한국영화 ‘헬로우 고스트’ 등 인간과 영혼에 대한 스토리텔링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어느 날’은 한 남자와 아직 죽지 않은 여자 몸의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새롭다. 무거운 영화지만 간간히 포진돼 있는 기대치 못한 애드리브와 기절씬이나 허우적대는 거울씬 등 생뚱맞은 상황도 자칫 무료할 수 있는 시퀀스에 재미를 싣기도 한다.

영화 도입부터 미드포인트 전까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캐릭터는 누구나 기다려왔던, 누구에게나 찾아 올 어느 날이라는 특별한 시간을 통해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어깨를 빌려준다. 특히 요즘같이 2030이든 4050이든 비슷한 사연과 상처를 안고 힘들게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영화 속 강수와 미소는 그리움과 이별을 통해 깊은 공감을 선물한다.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내색하지 못하는 면에서 서로 닮아있는 듯한 강수와 미소는 바로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게 묘사된다. 이윤기 감독은 미소라는 존재는 강수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일 수 있다고 말한다. 강수는 자신보다 더 불쌍하고 큰 슬픔을 안고 있는 미소를 보며 쉽게 동화되고 친구가 되어준다. 미소는 오히려 상처를 안고 잠들어 있는 현실 속 피해자의 모습이 아닌 영혼에서는 밝고 명랑한 이미지를 창조하며 지쳐있는 강수를 끌어안고 빛을 선사한다.

슬픔을 극복하고 세상을 넓게 바라보려한 영화의 시각은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만, 빠른 템포 속에 반전과 클라이막스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무료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