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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비 의도적으로 막으면
하늘 거역하는 일이라고 믿어
왕족만 양산 겸 의례용 우산 써

백성들, 비오는 날 외출할 때
풀 촘촘히 엮은 ‘도롱이’ 입어
남성 ‘갈모’ 여성 ‘전모’ 쓰기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촉촉한 봄비가 내리는 계절이다. 아침에 비 소식을 접하면 외출하기 전 우산 혹은 우비를 챙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는 어땠을까. 그 당시에도 우산이 있었을까. 비에 대처하는 조상들의 지혜를 알아보자.

◆짚이나 풀로 엮은 ‘도롱이’

사실 개화기 이전까지만 해도 백성들은 우산을 쓰지 않았다. 비가 내릴 때 의도적으로 비를 막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 다만 왕족들은 궁중에서 양산을 겸한 의례용 우산을 썼다.

그럼 백성들은 비를 다 맞았다는 말인가. 당연히 아니다. 백성들은 ‘도롱이’라는 것을 착용했다. 도롱이는 비가 올 때 어깨에 걸쳐 둘러 입던 우장으로, ‘사의(蓑衣)’라고도 불렀다.

지방에 따라 도랭이·도롱옷·드렁이·도링이·되랭이·되롱이 등의 방언이 있고, 옛말로는 되롱 혹은 누역이라고 했다. 도롱이는 짚이나 띠 같은 풀을 촘촘하게 잇달아 엮어 빗물이 스며들어 가지 않도록 했다. 줄거리 끝부분은 아래로 드리워서 빗물이 겉으로만 흘러내리게 했다.

도롱이는 윗옷과 아래옷이 따로 있었다. 윗옷은 목에 끈을 묶어서 어깨를 뒤덮게 돼 있다. 아래옷은 허리에 둘러서 치마처럼 입었다. 그 당시 농촌에서는 비 오는 날 외출하거나 들일을 할 때 어깨·허리에 걸치고 삿갓을 쓰기도 했다.

‘삿갓에 도롱이 입고 세우 중에 호미 메고…(생략)’. 조선 전기 학자인 김굉필의 시조 중 한 구절이다. 촉촉하게 비가 오는 날에 있어지는 소박한 일상임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남성은 ‘갈모’ 여성은 ‘전모’ 써

남자들은 도롱이와 삿갓 외에도 ‘갈모’를 썼다. 갓 위에 덮어쓰는 것으로, 위가 뾰족하고 밑은 둥근 고깔 모양이다. 부채 같은 원리로 만들어졌는데, 접으면 홀쭉해져서 휴대하기 편했다. 갈모는 종이로 만드는데, 기름을 먹인 종이로 만들어 비가 새지 않았다고 한다.

갓 위에 쓰고 밑 부분에 고정 줄을 턱밑에 묶어 사용했다. 갈모를 언제부터 썼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선조 때 문신인 이제신이 쓴 ‘청강선생후청쇄어’에는 명종 때를 전후한 입제(笠制)의 설명 중에 우모에 대한 것이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이미 널리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여자들은 비를 피하거나 햇볕을 가리기위해 쓰개의 한 종류인 ‘전모’를 머리에 썼다. 댓살을 엮어 그 위에 한지를 바르고 기름을 먹여 만든 전모는 지름이 어깨를 넘어설 정도로 넓어서 마치 손잡이 없는 우산 같았다고 한다.

◆양반은 ‘진신’ 평민은 ‘나막신’

비가 올 때 신는 신발도 있었다. 먼저 양반들은 ‘진신’이라는 가죽신을 신었다. ‘유혜’라고도 했으며 징을 박았다고 하여 ‘징신’이라고도 불렀다. 진신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비 올 때 신는 신발로, 생가죽을 기름에 절여 여러 겹 겹쳐서 만들었다. 바닥은 원령돌기로 만들어진 징을 박아 진흙이 달라붙는 것을 막았다. 가죽으로 만들었기에 진신은 대부분 상류계층인 양반이 신었다.

일반 평민에게는 신발이 없었을까. 아니다. ‘나막신’이 있었다. 나막신은 목재의 특성상 매우 두껍고 딱딱했다. 그래서 무게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가볍고 터지지 않고, 제직이 쉬운 은행나무나 오동나무·피나무·소나무·오리나무를 사용해 만들었다고 한다.

나막신은 신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널리 신었는데, 무겁다 보니 먼 길을 갈 때나 말을 탈 때는 신지 않았다고 한다. 삿갓이나 도롱이 등을 이용해 비를 피하던 백성들에게 조선 말기에 이르러 ‘지우산’이 보급됐다.

뽕나무로 만든 종이에 기름을 먹이거나 밀랍을 칠해 빗물을 막을 수 있도록 제작된 우산이다. 중국에서 시작돼서 우리나라, 일본 등을 거쳐 각 나라 지역적 특성에 맞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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