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태, 효종 3년 때 공식 문헌 첫 등장
이름 기원 多… 지명·어부 이름 따기도
‘밝게 해 주는 물고기’라는 의미도 지녀

잡는 시기, 방법, 크기 따라 이름 달라
‘강태·노가리·생태·북어’ 별칭만 60가지
19세기, 전국에 가장 많이 나던 생선

▲ 1982년 대진항 명태잡이 배 (출처: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맛있는 것은 청어, 많이 먹는 것은 명태’ ‘명태 눈알을 먹으면 눈이 좋아진다’ ‘동짓날 명태를 잡아야 맛이 좋고 건강에 좋다’.

이는 명태(明太)와 관련된 속담들이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명태. 다양한 조리법으로 국민과 함께해온 생선임을 속담이 대신 전하는 듯 하다.

◆1652년 공식 문헌에 첫 등장

예전에는 명태를 ‘북어(北魚)’라고 불렀다. 북쪽의 추운 지방에서 잡는 물고기라는 의미인데, 현재는 말린 명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다. 명태가 공식적으로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효종 3년(1652) 때다. 이 당시의 승정원일기에는 ‘강원도 지방에서 진상하는 대구알젓에 명태 알이 섞여 있어 해당 관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글이 적혀 있다.

 

‘명태’라는 이름의 기원에는 여러 가지설이 있다. 그중 고종 당시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1871년)’에서는 “함경도 명천(明川)에 태가라는 성을 지닌 어부가 어떤 물고기를 낚아 높은 분에게 바쳤는데 그 맛이 너무 맛있었으나, 생선 이름을 알지 못해 명천의 ‘명(明)’과 어부의 성인 ‘태(太)’자를 따서 ‘명태(明太)’라 했다”는 설이 가장 유명하다.

함경도에서는 예로부터 명태 간으로 기름을 짜서 등불을 밝혔기에 ‘밝게 해 주는 물고기’라는 의미로 명태라 불렀다고 한다. 또 영양부족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은 농민들 사이에서는 ‘명태 간을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이 같은 명태는 잡는 시기와 방법, 크기, 가공법,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별칭이 60가지나 됐다.

산란하고 바로잡힌 명태는 ‘꺽태’, 강원도 바다에서 잡은 명태는 ‘강태(江太)’, 크기가 작은 것은 ‘노가리’, 싱싱한 생물 명태는 ‘생태’, 이를 얼리면 ‘동태’라고 부른다.

또 말려서 딱딱한 것은 ‘북어’, 일교차에 따라 얼고 녹기를 반복해 속살이 노랗게 마른 명태는 ‘황태’라 한다.

▲ 1982년 거진 11리 명태덕장 (출처:국립민속박물관)

◆백성과 함께한 ‘명태’

실제로 조선시대에도 명태는 백성의 삶속에 깊게 스며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명태와 황태덕장’ 자료에 따르면, 흉년이 계속되던 영조 때에는 국가의 진휼미가 바닥을 드러내자 함경도 지역을 구제하는 방법으로 명태 무역을 생각해 냈다.

그 방법은 함경도 덕원·함흥 등에 쌓아 둔 명태를 영남 쌀 상인들의 곡물과 교환하는 방식이다. 명태 고기를 싸게 팔아 쌀 상인을 유도한 후 함경도에서는 명태를 실은 뱃삯을 후히 주어 연일(延日, 현 포항) 등으로 실어 보내 쌀을 사 오게 하는 방식이다.

고종 때 명태를 말린 북어는 궁녀들에게 지급되는 월급 개념의 선물이기도 했다. 고종 32년(1895)에 선물 품목이 대구에서 북어로 바뀌면서 대구어 1마리 대신 북어 5마리의 비율로 환산해 궁녀들에게 삭료로 지불했다.

또 군량품으로 지급되기도 했다. 고종 3년(1866) ‘문수산성’과 ‘정족산성’ 전쟁 때 순무영에 이소영이 북어 20쾌를 지원했다. 19세기에 명태 어업은 가장 중요한 어업의 하나였다.

조선 후기 문신인 서유구의 ‘난호어목지’에는 명태를 한자로 명태어(明鮐魚)라고 쓰고 속칭 생것은 명태, 말린 것은 북어라고 한다고 기록했다. 명태가 다산하여 전국에 넘쳐 흐르며 우리나라 수산물 중에서 명태는 청어와 더불어 가장 많이 나는 것이라고 했다.

또 한말에 일본인들이 저술한 각종 서적에도 당시 명태 자원이 놀라울 만큼 풍부했다고 기록됐다고 한다. 이 같은 명태는 기후변화와 무분별한 남획 등의 이유로 현재는 어획량이 급감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국민생선으로 사랑받고 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