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부터 사람은 강에 의존하며 살아왔다. 오늘날 강 주변으로 옛 유적이 발견되는 것은 강이 식생활의 중요한 장소임을 보여준다. 서울의 한강도 마찬가지다. 한강 주변에서 발견된 유적은 여러 시대를 담고 있다. 이는 한민족의 인류사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이와 관련, 한강유적에 담긴 삶을 알아봤다.

 

▲ 풍납토성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잃어버린 한성백제 비밀 간직한 곳
도시개발 속 살아남아 공원으로 조성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500년간의 한성백제의 비밀을 담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그 크기는 얼만 했을까. 대중교통을 통해 주변을 많이 지나쳤지만, 두 곳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건 쉽진 않았다. 이에 풍납토성에서 몽촌토성까지 거닐며 한성백제의 역사를 몸으로 느껴보기로 했다.

◆1600년 만에 드러난 ‘풍납토성’

3일 오후 지하철 5호선 천호역 10번 출구로 나오자, 흙으로 쌓인 높은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풍납토성이다. 산책로로 조성돼 시민이 쉽게 찾을 수 있는 풍납토성. 언덕이 멀리까지 이어져 있어 제법 웅장해 보였다. 백제시대에 사용했을 때는 얼마나 더컸단 말인가.

실제로 백제는 한반도의 고대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해양국가였다. 특히 한성백제는 백제의 700년 역사 중 500년간 서울(한성)에 수도를 뒀던 시기였다. 백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왕성인 ‘위례성’을 건축하고 풍요롭게 살며 화려한 문화 예술을 꽃피웠다.

그러나 5세기 말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대군에게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공주)’으로 천도하게 된다. 그 후 위례성은 폐허로 방치돼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잊혀졌다. 점차 그 흔적마저 땅속으로 묻혀 잃어버린 왕국이 되고 말았다. 1600년 동안 지하에 묻혀 있던 한성백제의 역사는 1997년 우연히 발견됐다. 풍납동의 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한 사학자가 한성백제 왕성 유적을 발견한 것.

이후 국가적인 차원에서 발굴 작업이 진행됐고,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 왕성이며 백제의 건축기술이 반영된 유적이라는 학설이 힘을 얻게 됐다. 현재 도시 개발로 풍납토성의 일부만 남아있지만, 역사성은 여전히 우수해 보였다.

▲ 풍납토성 경당지구 ⓒ천지일보(뉴스천지)

◆상류층 유물 발견된 풍납토성 경당지구

풍납토성 언덕을 따라 걸으니 풍납시장이 나왔다.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 ‘바람드리6길’로 곧장 빠져나가자 몇 분 후 ‘풍납토성 경당지구’를 만날 수 있었다.

공원으로 조성된 경당지구는 백제시대의 많은 유물이 발견된 곳이다. 유물은 왕·귀족 등 최고 상류층이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될 만큼 고급품이었다.

흙을 다져 쌓은 뒤 건물을 올렸을 것으로 보이는 초대형 지상건물, 제사에 사용된 듯한 말머리 뼈와 깨진 토기 등이 발견된 구덩이도 이곳에서 발견됐다. 중국에서 수입한 도자기가 다수 출토된 창고, 나무와 돌로 깊고 정연하게 쌓은 우물 등 경당지구의 다양한 시설과 유물은 백제 초기 지배층의 삶과 문화를 알려줬다.

▲ 풍납토성 경당지구에 있는 우물터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경당지구 안에는 우물터도 있었다. 주변에서 발견된 도랑의 존재를 볼 때 단순히 식수를 확보하기 위한 우물이 아니라 물이 들어오고 빠지는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우물을 보호하는 건축물이 있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출토된 토기를 볼 때 축조 시기는 5세기 전반 경으로 추정된다.

경당지구에서 나와 풍납치안센터 방향으로 걸어가면 왼편에 풍납토성이 길게 이어져 있다. 얼마나 긴지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과연 풍납토성의 크기를 피부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풍납토성 표지판에 따르면, 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진흙과 모래흙을 교대로 쌓아 올린 판축 토성으로 너비 43m, 높이 11m이다. 원래 둘레 3.5㎞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서벽 일부를 제외하고 2.1㎞만 남아 있다.

실제로 풍납토성은 걷기에는 제법 좋은 코스로 조성돼 있다. 산책이나 운동을 나온 시민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듬성듬성 토성이 끊어져 있어 아쉬움을 주기도 했다.

▲ 몽촌토성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남한산 자연 구릉 끝에 쌓은 ‘몽촌토성’

풍납토성에서 ‘올림픽공원’ 방향으로 20여분 정도 걸으니, 그 사이쯤에 정자인 ‘몽촌정’에 나왔다. 몽촌정 앞에 성내천이 흘렀는데, 그 위쪽으로 몽촌토성이 모습을 보였다. 눈에 보이는 것만 봐도 몽촌토성이 풍납토성보다 훨씬 웅장해 보였다.

몽촌토성은 현재는 평지성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남한산에서 뻗어 내려온 낮은 자연 구릉의 끝부분에 쌓은 일종의 산성이었다고 한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2285m, 높이는 6~40m로 지점에 따라 차이가 크다. 성벽 바깥쪽에 목책이 있고, 성내천이 토성을 감싸고 돌아 성 주위를 둘러싼 해자 역할을 했다.

서기 475년 고구려의 3만 대군이 백제의 왕도 한성을 공격했는데, 고구려 군이 먼저 한성의 북쪽 성을 7일 밤낮으로 공격해 함락하자, 남쪽 성에 있던 백제 개로왕이 성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잡혀 죽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백제의 왕도 한성이 북성과 남성 2개의 성으로 구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대개 북성이 지금의 서울 풍납동 토성, 남성이 서울 몽촌토성이라고 보고 있다.

이처럼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도시개발 속에서도 살아남아 그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특히 몽촌토성은 그 규모를 제법 잘 유지하면서 주변의 도시와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풍납토성은 도시 속에 간신히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듯해 아쉬움이 컸다. 도시 개발도 필요하지만 역사와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풍납·몽촌토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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