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구 노홍숙씨 “첫 손주 본 기쁨에 시작”
4200일간 빠짐없이… 첫 일기는 첫 손주에게 선물
남편 “아이들이 자란 후 개인역사 될 것” 응원
[천지일보=박정렬 기자] 지난 3월 중순 본지 ‘나의일기’ 기획부로 도착한 우편물. 그 안에는 노홍숙(65, 여,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씨가 보내온 노랑바탕에 쓴 아기자기한 편지와 일기사본, 30여권의 일기장 사진이 들어있었다.
첫 손주가 태어난 이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고 있다는 노씨를 지난달 30일 서울 동작구 자택에서 만났다. 현관문을 들어서니 노씨의 시와 손주들 사진이 담긴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노씨는 자신을 네 명의 손주가 있는 할머니라고 소개했다. 노씨의 카카오톡 대화명은 ‘천사할미’다.
“첫 외손주를 봤는데 그 기쁨이 얼마나 크던지 2005년 9월 29일부터 쓰기 시작해 하루도 빠짐없이 쓰고 있어요.”
무려 12년, 날짜를 세보니 4200일이 넘었다. 노씨 일기의 주요 주제는 손주의 일상이다. 그간 손주 넷을 봤고 일기는 28권이 됐다. 손주들이 하루하루 어떻게 지냈고, 어떤 기분이었고 어떤 표정이었는지 편지 쓰듯, 때론 그림과 함께 쓴 일기 속에는 그야말로 손주 바보 ‘천사할미’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있다.
“밤이 늦어도 일기만은 꼭 써요. 밖에 나가 일기장이 없을 때는 다른 종이에 적었다가 일기장에 붙여놓더라도 거르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쓴 첫 일기는 첫 손주 지훈이에게 선물로 줬다. 지훈이는 지금 6학년이다. 노씨의 일기장에는 지훈이의 반성문 한장이 붙어 있다. 지훈이가 엄마의 핸드폰을 학교에 가져갔다가 혼이 나 쓴 반성문이다. 반성문 바로 밑에는 동생 지민이가 이런 오빠를 위로하는 쪽지도 붙어 있다. 일기장은 이렇듯 사랑스러운 손주들을 만나는 행복의 통로가 되고 있다.
노씨의 일기장에는 손주들의 시간표, 지민이가 사촌동생인 예원·예린이를 그려 넣은 쪽지, 아이들이 다녀온 박물관 티켓 등으로 빼곡하다. 이처럼 노씨가 손주들의 일상을 매일 적을 수 있는 것은 출가한 자녀들이 한 동네에 살아 3대가 함께 모이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손주들의 성장기이자 가족사가 담긴 노씨 일기는 때론 손주들의 성장 비교 자료가 되기도 한다. 세살인 네째 손주가 아직 말을 잘 못하는데 다른 애들은 그 나이 때 어땠나 들춰보는 식이다.
노씨는 “일기를 매일 쓰다 보니 아이들과 항상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 좋다”고 했다. 보여주진 않지만 때론 남편, 며느리에게 하고픈 말도 쓴다.
사실 노씨의 일기쓰기는 남편 간병일지부터 시작됐다. 사업을 하던 노씨의 남편 나성웅(74)씨에게 2002년 갑자기 대장암 판정이 내려졌다. 4기에 가까워 급하게 수술을 했다. 그날 이후 노씨는 매일 남편의 건강상태를 체크하면서 간병일지를 썼다. 그때 메모 습관이 이후 일기쓰기로 이어진 셈이다. 노씨의 세심한 간호를 받은 남편 나씨는 건강을 되찾았다.
노씨는 본지에 일기 사본을 보내면서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지일보의 ‘나의일기’ 광고를 보고 자랑하고 싶어 보내긴 했는데 신문에 실릴지 몰라 남편에겐 말하지 않았다”며 기자가 인터뷰 하러 온다 하니 그때 남편에게 얘기했다고 한다.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남편 나씨는 “아이들이 어른이 된 후에 일기를 보며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추억하는 소중한 선물이 될 것”이라면서 “나중에 아이들이 컸을 때 자서전이라도 쓰려면 어릴 적 모습을 회상할 수 있는 개인의 역사가 되지 않겠냐”며 아내를 응원했다.
아마추어 시인으로도 활동하는 노씨에겐 세월을 잊은 소녀 감성이 남아 있다. 공원을 산책하며 네잎클로버를 찾아 남편에게 선물하고, 아이들에게도 주고 주변 지인들에게도 전해준다. 본사로 보낸 우편물에도 단풍잎과 네잎클로버가 함께 들어 있었다. 손주들의 자라는 모습을 글로 적다 보니 주변이나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도 소녀처럼 된 듯했다. 학창시절 문학소녀였냐고 물으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2019년 6월이면 노씨의 일기도 5000일을 맞이한다. 아직 출가하지 않은 딸이 있다는 노씨. 그때쯤이면 천사할미의 일기 주인공이 더 늘어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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