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발달은 직업을 변화시켰다.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는가 하면, 많은 직업이 하나둘씩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사진 속,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추억의 직업들. 그 시절을 살았던 세대에겐 아련하고, 젊은이에겐 그저 신기한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그때가 있었기에 현재도, 미래도 존재하는 법. 이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추억의 직업을 알아봤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1876년 개항 대륙에서 해양으로’ 展에서 전시돼 있던 전화교환수 옛 모습.

남성에서 여성으로 교환원 바뀌어
다양한 사람의 목소리 구분하고
목소리도 명랑한 사람 우선 선발

1970년대 초반까지 교환원 존재해
자동 전화 생겨나면서 점차 없어져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네, 어디로 연결시켜드릴까요?”

일반인이 처음 전화를 사용했을 무렵, 전화를 중간에서 연결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이렇게 전화를 연결해 주는 사람을 ‘전화교환원’이라고 불렀다.

개인용 휴대전화까지 있는 오늘날에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테지만, 과거에는 그랬다. 당시에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 때 전화교환원은 꼭 필요했던 존재였다. 옛 모습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통해서 전화교환원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1920년대, 여성이 전화교환원 역할

우리나라에 처음 전화기가 개통된 것은 1896년이다. 당시에는 덕수궁 내부에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됐다. 궁에 전화가 설치되고 6년 후인 1902년, 일반인도 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한성(서울)과 인천 간에 전화가 개설되고 한성전화소에서 전화 업무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초창기 우리나라 전화 사업은 1905년 일본이 통신권을 빼앗아 가며 수난을 겪기도 했다. 초기에는 남성이 전화교환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다 1920년대 이후 여성이 전화교환원으로 자리 잡았다. 여성의 경우도 처음에는 일본 여성이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조선 여성의 수가 늘어났다.

1930년대 전화교환원 전체 인원은 200명을 훌쩍 뛰어넘었다. 일어가 능숙하고 보통학교 졸업이상의 여성이 채용됐으며, 15~20세 초반미혼여성이 대부분이었다. 이 당시 전화교환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건강이었다고 한다. 장시간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다양한 사람의 목소리를 구분해 알아들어야 해서 청각이 예민하고 목소리가 명랑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선발했다. 키 제한도 있었다. 전화기의 높이 때문이었는데, 당시 도량형으로 4척 7촌(141㎝)의 키를 가진 사람이 이상적인 조건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1970년대까지 여성의 인기 직종

1970년대 초까지 수동식 전화가 주로 쓰였다. 수동식에는 자석식과 공전식이 있었는데, 모두 교환원이 필요하다. 그러다보니 전화교환원은 여성의 인기 직종이었다. 자석식은 전화기에 붙은 핸들을 돌리면 교환원이 나오고 전화번호를 말하면 교환원이 연결해 주는 방식이었다. 공전식은 전화기를 들기만 하면 교환원이 나왔다. 이 같은 수동식 전화 연결이 가능한 것은 당시에 전화 가입자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반 전화기는 흔히 ‘흑통’ ‘백통’으로 불렸다. 교환원을 거치는 수동식전화는 ‘흑통’, 교환원 없는 자동식 전화는 ‘백통’으로 불렸으며, 보통 부자들만이 사용했다. 이때만 해도 전화기는 무척 귀했다. 비싸기도 했지만, 돈이 있어 가설 신청을 해도, 한두 달 이상 기다려야 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후 통신시설이 발달되고 자동전화가 생겨나면서 전화교환원은 자연스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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