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이 땅의 속내 담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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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천지일보(뉴스천지)

[지리산 노고단, 경남 하동·진주 기행]

한민족의 굵직한 역사와 함께해온 민족의 영산(靈山) 지리산.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다. 또 ‘멀리 백두대간이 흘러왔다’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한다?’ 귀가 솔깃해진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걸까. 그 물음표가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마다 머무른다.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수만 년 자연의 이치를 따라 인고의 세월을 견뎌냈을 그들에게서 그 힘이 느껴지는 듯하다.

▲ 지리산 노고단 가는길 ⓒ천지일보(뉴스천지)


지리산 노고운해에 마음 한 뼘 자라다
노고단(1507m)은 천왕봉·반야봉과 함께 지리산 3대봉으로 꼽힌다. 노고단 산행은 천왕봉 코스에 비하면 산책로나 다름없다. 일행이 찾았을 때도 서너 살 꼬마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가족 단위로 찾아온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주변 풍경도 구름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 뿌연 안개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신비로움을 더했다. 지리산 10경 중 하나인 ‘노고운해’다. 고산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현상인 운해는 이곳이 으뜸이라고 한다. 노고단 정상 부근에는 노란 원추리, 동자꽃, 둥근이질풀 등 형형색색의 야생화가 만발해 있었다. 유유히 흐르는 운해를 바탕으로 노란색과 주황색 점을 찍어 놓은 한 폭의 수채화가 그려졌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함께 올라온 아이들도 노고운해 앞에서 감탄을 자아냈다. 그 모습이 참 예쁘다. 그들 마음 키도 한 뼘은 쑥 자라났을 것 같다.

 

▲  ⓒ천지일보(뉴스천지)

지리산·섬진강에서 태어난 역사시 ‘토지’
이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민족 인고의 세월을 글로 풀어낸 무대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다. 한국 현대문학 100년 역사 가운데 대작(大作) 중 하나로 꼽히는 고(故) 박경리 선생의 <토지>. 25년에 걸쳐 완성된 만큼 평사리의 대지주 최참판댁과 그 소작인들의 4대에 걸친 이야기가 담겼다. 수백 년간 유지돼온 봉건질서의 뿌리가 갑오개혁 동학농민혁명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한말의 혼돈에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이후 일제 식민지를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 60여 년 민중의 삶이 토지 전체에 녹아 있다. 평사리가 <토지>의 근간이며 뿌리인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다. ‘토지’를 집필한 고(故) 박경리 선생은 이곳 평사리와 아무 연고가 없다. 박경리 선생의 고향은 경남 통영, <토지> 집필을 위해 30여 년간 머문 곳도 강원도 원주다. 박경리 선생은 평사리를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그런 그가 어째서 이곳을 소설 속 배경으로 삼았을까. 살아생전 그의 대답은 이랬다.

“평사리를 감싸 안은 지리산과 섬진강이 지닌 역사적 자취, 경상도 땅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넓은 들녘이 구상 중인 소설의 배경에 더없이 어울려 보였다. 큰 부잣집이 있었는데 역병으로 가솔들을 잃어 넓은 들판의 곡식을 추수하지도 못한 채 버려두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작품 구상에 도움을 받았다.”

평사리에는 소설 <토지>에 나오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낸 드라마 ‘토지’ 세트장이 있다. 여기서 꼭 들러야 할 곳을 꼽으라면 단연 최참판댁 사랑채다. 사랑채 대청마루에 올라서면 평사리 넓은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 현대문학의 걸작이 왜 이곳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공감되는 곳이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소설 속 주인공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최참판댁 지주 최치수는 이 마루에 앉아 들판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고 검게 그을린 소작인들은 분주히 마당을 오간다. 그들의 움직임 속에 삶에 대한 애착이 녹아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해가 길다.

최유찬 연세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토지>는 민중의 삶을 통해 우리 민족이 역경과 고난을 딛고 승리를 일궈낸 강인한 생명력에 대한 찬사다.”

▲ 진주성 의암 ⓒ천지일보(뉴스천지)


붉은 피보다 더 붉은 사랑
모질고 험난한 삶에도 굴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은 한 여인을 찾아 경남 진주의 진주성으로 향했다. 잘 가꿔진 잔디밭이 눈에 들어온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성 곳곳에 남아 있는 유물을 통해 진주성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성을 둘러보다 보니 논개보다 먼저 김시민 장군에 대한 기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찾아 세월을 더듬어 본다. 1592년 10월(선조 25), 왜군 2만여 명이 진주성을 침략해왔다. 이때 김시민 장군을 중심으로 관군과 민간의병 3800여 명이 왜군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그는 적탄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조선에 들어와 매 전투 승승장구했던 왜군으로서는 충격적인 패배였다. 이 패배를 설욕하고자 이를 간 왜군은 이듬해인 1593년 7월, 10만 군과 800척 선박 등 모든 병력을 동원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1차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한 민·관·군이 그리 만만할 리 없었다. 전투는 7일간 계속됐다. 하지만 왜군의 대규모 병력 앞에 진주성은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7만 민·관·군은 모두 순국하고 말았다. 말이 7만이지, 상상도 못할 수다. 그 참혹한 모습을 바라봐야 했던 진주성 백성들, 부모와 처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들의 마음도, 성을 휘감아 도는 남강도 피보다 더 붉디붉게 물들었으리라.

임진왜란 당시 진주 관기(官妓)였던 논개. 논개는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왜군에 함락 당하자 왜장을 유인해 함께 남강으로 몸을 던졌다. 김시민 장군을 비롯해 7만 민·관·군이 잠든 그곳으로 말이다. 당시 그녀의 순절에 함께했던 바위는 후대에 와서 ‘의로운 바위’ 즉 ‘의암’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논개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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