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부터 사람은 강에 의존하며 살아왔다. 오늘날 강 주변으로 옛 유적이 발견되는 것은 강이 식생활의 중요한 장소임을 보여준다. 서울의 한강도 마찬가지다. 한강 주변에서 발견된 유적은 여러 시대를 담고 있다. 이는 한민족의 인류사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이와 관련, 한강유적에 담긴 삶을 알아봤다.

 

▲ 도심 속에 오롯이 자리잡고 있는 망원정 ⓒ천지일보(뉴스천지)

한강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에 위치
가뭄에 농가 살핀 세종이 정자 오르자
때마침 단비 내려 ‘희우정’이라 불려

월산대군 소유된 후 ‘망원정’이라 개칭
‘먼 경치도 잘 볼 수 있다’는 뜻 지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스쳐 지나가는 바람도 이곳이 좋은 걸까. 도심 속 홀로 있는 ‘망원정(望遠亭)’에는 바람이 쉬어가듯, 선선한 바람이 맴돌았다.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한강. 조선시대 선비들이 이곳에 와서 시 한 수를 읊조리는 모습이 절로 눈앞에 그려졌다.

◆세종이 찾았던 별장

27일 오전 서울 마포구의 주택 사이로 옛 건물 하나가 모습을 보였다. 망원정이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동명이 유래된 망원정은 양화나루 서쪽에 있는 옛 모습의 정자다. 1925년 큰 홍수로 사라진 망원정은 1989년 10월에 복원돼 현재 서울시 제9호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한강의 경치를 굽어보는 낮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망원정은 수려한 풍경에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주 찾았던 곳이었다.

원래 이 정자는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세종대왕 6년(1424)에 지은 별장이다. 이곳에 정자를 세운 이유는 주위 한강변으로 풀밭이 있어서 수군과 육군들이 이곳을 훈련장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의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었다.

1425년 가뭄이 계속되자 세종이 농가 형편을 살피러 효령대군이 기거하던 마포구에 거동했다가 효령대군의 별장인 정자에 올랐는데, 때마침 단비가 내려 들판을 흡족히 적시었다. 이에 세종은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이라고 명하며 글씨를 내렸다.

중종실록(중종 32) 4월 9일 기사에도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요사이 날씨를 보건대 과연 가물 징조가 있으니 법사가 아뢴 말이 지당하다. 내가 일찍이 ‘여지승람’을 보니, 망원정기에 ‘세종조에 비가 흡족하지 못하므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바야흐로 깊었었는데 망원정에 행행하여 관가하다가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즐거운 나머지 정자 이름을 희우정이라 내렸다’고 했었다.”

또 이곳에서는 약간의 농사도 지었는데, 세종은 자주 희우정에 와서 농사일을 살피고 수군들의 군사훈련을 참관했다.

▲ 망원정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강과 주변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월산대군, 정자 보수해 ‘망원정’이라 개칭

이후 1484년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소유로 바뀌게 되는데, 이때 월산대군은 정자를 보수했다. 그리고 ‘산과 강을 잇는 아름다운 경치를 멀리까지 바라본다’는 뜻으로 이름을 ‘망원정’이라고 고쳐 지었다.

과연 망원정이라는 이름이 제격인 게, 이곳에 서서 멀리 바라보면 한강과 주변의 산세가 어우러졌다.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사계절의 절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러한데,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간직한 조선시대에는 오죽했겠는가.

실제로 성종은 세종 때의 예에 따라 매년 봄·가을에 이곳에 거동해 농사의 정도를 살피고 문인명사들과 시주를 즐겼다. 월산대군은 특히 이곳의 경치를 좋아해 눈 덮인 양화벌의 겨울 경치를 ‘양화답설’이라고 하여 ‘한성십영(漢城十詠: 한성을 대표하는 열 가지 볼거리)’의 하나로 손꼽았다. 이 같은 아름다운 곳이지만 성종은 월산대군이 죽은후에는 정자를 다시 찾지 않았다고 한다.

▲ 망원정의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연산군 때에는 이름이 바뀔 뻔 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해인 1506년, 연산군은 창외문 밖 탕춘대에 호화찬란한 탕춘경을 짓게 하고 한강 변에 있는 망원정을 천여 명이 앉을 수 있도록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한다. 이름도 ‘수려정’으로 고친다.

하지만 9월 중종반정으로 모든 확대공사가 중단되고 철거되면서, 망원정은 본래의 경치가 좋은 모습으로 남게 됐다. 그리고 명사들이 시 읊는 장소로 바뀐다.

또 이곳은 주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로 사용됐고, 잠두봉(현 절두산)과도 가까워 잠두봉으로 가는 길에 들리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유서 깊은 망원정은 1925년(을축년) 서울지역의 대홍수와 한강 개발 사업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후 1987년 현지 발굴조사를 통해 망원정의 복원이 결정됐다. 그리고 1989년 모습을 잃은 망원정은 다시 복원됐다. 누각의 형태는 2층 누각에 팔작 기와집의 정자와 동쪽에 단층의 맛배지붕 형식의 솟을삼문이 있다. 강변북로 방향인 정면 처마 아래에는 ‘망원정’,누각의 안쪽에는 ‘희우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복원된 망원정이지만 이곳이 과연 ‘한성십영’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듯, 여전히 한강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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