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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파법’보다 생산력 높고 일손 줄지만
가뭄 시 농사 망쳐 위험하다고 여겨
농사 인력 줄어 세금 줄어들까 우려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농업 국가였던 조선시대. 국가 생산력의 절대다수를 농업에 의존했다. 그런데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줄곧 ‘모내기법’ 즉 ‘이앙법’을 법으로 금지했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이앙법이야말로 농업의 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인데, 왜 금지했던 걸까.

◆‘직파법’보다 생산력 높은 ‘이앙법’

모내기란 벼농사를 지을 때 씨를 바로 논에 뿌리는 게 아니라, 모판에서 모를 키운 후 싹을 틔워 일정하게 자랄 때까지 키운 다음 물을 댄 논에 옮겨 심는 방법이다. ‘이앙법’이라고도 부른다.

이앙법의 장점은 높은 생산력이다. 모내기 과정에서 나쁜 모를 골라내고 튼튼한 모만 옮겨 심을 수 있어서 수확량을 2배나 늘릴 수 있다. 또 벼 포기 사이를 넓게 심어 그 사이의 잡초 뽑기(김매기)가 쉬워 일손을 줄일 수 있다. 그러다보니 1인당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규모도 커진다.

이 같은 이앙법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시행됐으나, 이앙법이 본격적으로 널리 보급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다.

그 사이에도 이앙법은 있었지만 ‘직파법’으로 벼농사를 지었다. 직파법은 볍씨를 논에 직접 뿌리는 방식이다. 잡초도 많이 생기고 노동력도 많이 들었지만, 조선 초기에는 직파법을 이용했다. 왜 그랬던 걸까.

◆가뭄에 약한 이앙법

가뭄에 약한 이앙법은 매우 위험한 농사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논에 물이 있어야 하는데, 가뭄이 들어서 물이 부족할 경우 모를 한 포기도 심을 수 없었다. 이에 조선 초기에는 이앙법을 법으로 금지했다. 그 대신 가뭄의 피해가 그나마 적은 직파법으로 벼농사를 짓게 했다. 

실제로 1429년에 편찬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농업 서적인 ‘농사직설’에서는 “이앙법은 물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는 매우 위험한 재배법”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1414년(태종 14) 6월 11일자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앙법을 금지하는 글이 실려 있다. “내가 들으니, 경상도의 백성은 여름철을 당해 모(稻苗)를 옮겨 심는다고 하는데, 만약 가뭄을 만나면 모두 농사를 망칠 것이니, 명년부터 일절 금지하라.”

◆임란 후, 이앙법 널리 보급돼

이앙법을 금지했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당시에는 세금을 내지 않는 계층 양반과 노비 외에 조세징수의 주요 대상은 양민이었다. 그렇다고 양민의 수가 그렇게 많은 것만은 아니었다.

만약 이앙법 확대 정착으로 농사에 투입되는 양민의 인력이 감소하면 토지 대비 징수의 근거가 무너져 조세의 뼈대가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익을 추구하는 본능은 이앙법을 마다할리가 없었다. 자기 땅을 소유한 농민이면 수확량이 많은 이앙법을 원하지 않았을까. 결국 임진왜란 이후 논에 물 대기만 할 수 있다면 너나 할 거 없이 이앙법을 하려 했다. 이에 농촌 사회에서 빈부 격차가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부농’ 또는 ‘광작농’이라고 일컬어지는 부농층이 생겨났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벼 재배법으로 이앙법이 자리잡게 됐고, 오늘날까지도 수전농업에서 이앙법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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