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최근 검찰 조사를 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권부인 ‘청와대를 찍고’ 검찰에 불려가는 수모를 겪은 대통령이 벌써 4명째다. 임기 5년 단임 대통령의 청와대 생활은 비유컨대 그저 족문(足紋)이나 청와대에 찍고 지나가는 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렇게 짧은 청와대 생활 끝에 검찰에 불려가는 전직 대통령들이 속출하는 것은 청와대가 대통령들에게 자손만대와 민족에 그들의 고매한 이름을 남기는 영광의 징검다리가 아니라 도리어 수치의 산실(産室) 역할을 거듭 톡톡히 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 박근혜까지 황제의 권력을 휘두른 대통령들이지만 검찰에 불려가는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근심에 차고 어깨는 축 늘어졌었다. 천당에서 지옥으로의 추락 바로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이렇게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옛 영광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초라한 부조화가 반복적으로 자주 연출되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나라는 한국 빼고는 지구상에 없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우리가 특별히 민주주의에 강한 나라여서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적폐가 심한 나라이며 그것이 시원하게 청산되거나 고쳐지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지적한다면 정치와 정치인의 품격과 자질이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으며 항상 옛 수준 그대로의 타령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목하 초유의 탄핵 사태로 궐위가 된 대통령을 뽑는 대선(大選) 운동이 후끈 달아올랐다. 정치적 야망가들이 벌이는 사생결단과 같은 대권 놀음이 벌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분위기는 마치 별을 잡아먹는 우주 공간의 블랙홀(black hole)처럼 우리의 공적·사적인 일상의 관심들을 온통 선거전으로 빨아들였다. 한시도 경각심을 늦출 수 없는 절박한 민생 위기와 국가 안위에 대한 촉각(觸覺)과 관심마저도 망각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히 염려되는 형편이다. 그런 선거 분위기에 정신이 팔린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대초원 사바나(savanna)의 수풀에 매복해 기습의 기회를 노리는 포식자에 무방비로 태연히 몸을 드러내고 있는 가냘픈 영양(羚羊)이나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느껴지게 한다. 어느 후보가 대내외에 국민들이 안심할 만한 충분하고도 용의주도한 사주경계(四周警戒)의 눈을 번뜩인다고 볼 상황도 아니다. 그만큼 모두가 권력 쟁취에만 미쳐있다. 

그렇다고 후끈 달아 오른 대선 운동 자체에 거부반응을 보일 까닭은 없다. 선거 운동이 달아오르는 것은 후보들에 대한 더 정확한 검증 찬스를 유권자들에게 확대해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굴곡진 정치사의 경험을 통해 예민해진 국민들의 정치적 감수성(感受性; receptivity)이 후보들의 정견(政見)들에서 불안감을 느낄 만한 일들이 허다하게 노출되고 있는 점이다. 동시에 비전(vision)보다는 그들의 핏발 선 권력욕이 국민들을 진저리 치게 만들고 있는 것 역시 그러하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여파로 정견이 대체로 과격하게 흐르는 점은 상황을 활용하는 선거 전략일 수도 있다고 이해 못할 것은 없다. 그렇지만 아직도 내면에서 용암처럼 들끓는 증오와 적의가 정치인 자신의 정치 행위를 추동하는 주된 에너지가 아닌가 비치는 것은 국민들의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증오와 적의로 정치판과 선거판을 갈아엎으려 하고 또 그것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혁명하기에 적당한 발상이지 선거로 심판받는 모범적이고 겸허한 대중정치인의 자세는 아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떤 까닭에서든 국민들 다수가 불안하게 생각하는 일을 국민적 합의 없이 감행하려하는 정치인은 민주주의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라 독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 정치인들은 필시 미래지향적인 정치인이 아니라 한(恨)을 가진 과거 회귀적 정치인이기 쉬우며 그의 정치는 보복 정치로 갈 개연성이 농후하다. 그런 정치는 파괴적이고 불통이며 일방통행식이 되어 정치 불안과 사회불안을 낳고 그것이 정치 리스크(risk)로 작용해 끝내는 민생불안을 야기해놓을 것이 불을 보듯 빤하다. 더 나아가 만약 그 같은 정치인이 대통령이 된다면 그가 바로 청와대를 불명예와 수모의 산실로 만들어놓고야 말 위험인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정치가 생산적으로 성숙해져 사회분열과 갈등의 원인이나 원심력을 제공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지 않는 국민은 없다. 그렇지만 엄연한 현실은 그동안 정치현장을 누비고 지나간 보스를 따라 여러 갈레로 찢긴 제(諸)정치 세력들이 주요 고비마다 국민화합의 구심력으로 작용하기보다 오히려 국론 분열을 심화시키는 원심력으로 작용해왔다는 점을 절대로 가볍게 볼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안고 있는 수많은 청산 대상의 정치 사회 경제 역사적인 적폐(積弊) 중에서 가장 시급히 청산돼야 할 적폐는 국민생활과 국정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최상위 개념인 정치에 존재하는 만악(萬惡)의 근원인 그 같은 정치적 적폐다. 그것을 더 방치해두었다간 어느 시점에 가서는 나라가 갈갈이 찢기고 갈리어 더 이상 정체성(identity)과 완전성(integrity)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은 효과적인 방법론도 없이 막연하고 전투적인 역사적 적폐 정산만을 부르짖기에 앞서 그들 스스로가 안고 있는 정치적 적폐 청산을 먼저 들고 나옴으로써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마땅하다. 기실 그들이 부르짖는 역사적 적폐 청산은 정밀한 외과수술 식의 효과적이고 교각살우(矯角殺牛)와 같은 부작용이 없는 깨끗한 방법론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짧은 5년의 단임 대통령이 임기 내에 그것을 완벽하게 해낼 방법은 더욱 없다고 봐야 한다. 만약 설득력 있는 적절한 방법론만 찾아진다면 물론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대통령 탄핵을 놓고 촛불과 태극기로 민심이 나뉘어 시끄러웠듯이 나라만 소란스런 전쟁터가 되고 말지 알 수 없다. 

어떻든 대선 운동은 피아(彼我)를 망라한 득표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라지 않는 방법으로 전개돼나간다. 유력 후보 선거 캠프의 인적 구성은 잡다한 모자이크(mosaic) 무늬다. 그러면서도 구호는 이분법적이고 전투적이며 진영논리가 우세하다. 진영 논리의 정치는 바로 불통정치다. 불통정치는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청와대 찍고 검찰로 직행하는 대통령을 만들어내기 쉽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다음 대통령부터는 그것이 괜한 걱정거리에 불과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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