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태 중국 북경화지아대학교 교수

 

‘친구 간의 참된 우정, 절친한 친구 사이’를 뜻하는 대표적인 표현으로 ‘관포지교’를 떠올린다. 약 2500년 전 기원전 7세기 춘추전국시대에 제(齊)나라 출신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이야기에서 유래됐다. 관중과 포숙은 젊어서부터 같이 사업을 할 정도로 절친했지만 관중은 늘 자신에게 유리한 계책을 짰다. 이러한 관중을 포숙은 늘 용서하며 배려했다. 이야기의 주요 시사점은 관중을 용서하며 제나라 재상으로 천거한 포숙, 그리고 중상주의와 부국강병 정책을 실행했던 관중 사이의 우정이야말로 현 시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정치와 경제에 적지 않은 방향타를 제시해 준다는 점이다.

제나라는 왕 ‘양공’ 재위 시 부실한 국정운영으로 사회·국가적으로 혼란이 심했다. 이를 틈타 포숙은 ‘소백(小白)’을 모시고 거나라로 망명했는가 하면, 관중은 소백의 형인 ‘규(糾)’를 모시고 노나라로 망명했다. 이후 제나라에 권력 공백 상태가 찾아오자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관중은 규를 모시고 포숙은 소백을 모시고 귀국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관중이 소백을 활로 쏘아 암살하려 한다. 소백이 들어오는 길목에 매복을 한 관중은 소백을 보자마자 활을 당겼으나 화살은 소백의 허리띠 쇠고리를 맞혔다. 그 순간 소백은 진짜 화살을 맞은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연기를 한다. 이러한 광경을 본 관중은 소백의 암살에 성공했다고 여겼다. 관중은 규를 모시고 느긋한 마음으로 제나라 수도인 임치로 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관중이 제나라 임치에 도착하기 전에 포숙과 소백이 임치에 도착해 권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백이 춘추전국시대 주변 제후국을 호령했던 제환공(齊桓公)이다. 소백은 자신을 죽이려 한 관중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포숙은 환공에게 중원의 패자가 되기 위해서는 관중이 필요하다며 그를 강력 추천했다. 마침내 환공은 포숙의 추천으로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하게 된다. 파격적이고 놀라운 리더십을 발휘한 셈이다. 포숙은 관중을 재상으로 천거하면서도 자신은 중요 요직을 맡지 못한 채 뒷전으로 물러났다. 포숙의 관중에 대한 무한 신뢰가 적용됐던 것이다. 적대 세력이었던 관중을 제나라 재상으로 발탁한 환공의 용인술은 국가경영의 효율성과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관중은 ‘부민부국’을 목표로 전통적인 중농주의(重農主義)에서 탈피하여 중상주의(重商主義)를 채택하며 약 40년 동안 제나라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마침내 제나라를 중원에서 가장 힘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내치와 외교에서 두루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 셈이다. 그는 군비를 튼튼히 하고자 하였으며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 하였다. 백성들의 불편을 덜어주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데 국정운영의 역점을 뒀다. 그야말로 국정운영의 최우선 정책으로 백성의 생활고 해결을 중점 과제로 삼았던 셈이다. 이런 연유로 민심은 자연스럽게 순응하게 됐다.

그의 친구 포숙은 관중의 능력을 간파하는 능력이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약소국 제나라를 당대 최초의 패권국으로 성장케 한 원동력이었다. 관중의 뛰어난 외교력 또한 제나라의 환공을 최고의 리더로 등극하도록 했다.

현 시점에서 ‘관포지교’와 같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사심 없는 친구가 필요하다. 개인 간의 우정도 물론 중요하지만 공적 이익, 국가를 위한 활동이 절실히 요구된다 하겠다. 무한신뢰, 상호신뢰를 줄 수 있는 공적 우정으로서의 관포지교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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