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10여년 전 길을 잘못 안내하는 이정표 때문에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오후에 잠시 산에 올랐다가 엉뚱한 이정표로 인해 고난을 겪은 일이다. 평일에 혼자 찾은 서울 근교 산에서 모처럼 만끽하게 된 늦가을 정취였다. 도시생활에 답답하기만 했던 필자에게는 단풍과 소슬한 가을바람과 맑은 공기는 산소같은 힐링이었다. 생각보다 크고 깊은 산이었다. 하산길이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이 눈에 띄지 않고 간간이 낯선 짐승들 울음소리만 들렸다. 한적한 산길에서 여유로왔던 발걸음이 갑자기 급해졌다.

문제는 갈림길에서였다. 이정표 하나가 필자가 걸어내려가던 반대방향으로 하산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려오던 길을 그대로 가면 마을 쪽이 아니라 산 정상을 향해 가게 된다는 안내였다. 내려오던 길을 다시 올라가야 산기슭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 이정표를 믿고 발길을 되돌렸다. 그러나 예감이 이상했다. 아무리 걸어도 자꾸 오르막만 나왔다. 산문(山門)에 닿기는커녕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발길을 반대방향으로 돌리고 걸었지만 한참 만에 또 그 갈림길과 이정표를 만났다. 이정표를 믿어야 하나, 믿지 말아야 하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오던 길로 발길을 되돌렸다가 또 되돌아왔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했다. 하지만 끝내 정확한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 때는 스마트폰 시대가 아니었다. 당시의 구형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119에 조난신고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부끄러웠다. 고민 끝에 114에 전화해 알아낸 전화번호로 국립공원 관리소에 연락해 문의했다.

“이정표 따라 가면 하산하는 길이 나오나요? 길 안내대로라면 자꾸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 같은데요….”

다른 도움은 필요 없으니 이정표가 실제와 맞는지만 말해달라고 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이정표는 옳다는 대답이었다. 애써 침착하기로 했지만 초조해졌다. 고민 끝에 발길을 돌려 이정표대로 길을 걸어 올라갔다. 그러나 또다시 아닌 것 같아 또 발길을 돌렸다. 그러기를 몇 차례 더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에 날은 캄캄해졌고, 몸과 마음도 지치기 시작했다. 잠시 이정표 옆에 앉아 쉴 때 어둠속에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짐승들이 평소와 달리 살갑기는커녕 공포감을 안겨줬다. 쌀쌀한 밤공기 속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 안 되면 119에 도움을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반가운 인기척과 함께 뛰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휴우~’, 다행이다 싶었다. 곧바로 길안내가 잘못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길 건너편에 꽂혀있어야 했다. 좌우가 서로 바뀐 반대방향으로 길을 잘못 안내하고 있는 이정표였다. 필자는 관리소 직원들의 사과를 듣는 둥 마는 둥 놀라고 황망한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잘못된 이정표야말로 믿고 따르는 보행자를 힘들게 한다. 이정표를 국가로 비유하자면 헌법이 될 수도 있고 위정자(爲政者)가 될 수도 있다. 이정표의 오류는 등산하다 필자처럼 길을 찾지 못하고 ‘뺑뺑이’ 돌게 만든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헌법과 대통령이, 정치권이 제 역할을 못하게 되면 국가 기틀이 흔들리고 국민이 우왕좌왕하게 된다. 우리 헌법은 30년 전인 군사독재 시절 국민 뜻을 외면하고 만든 ‘그들만의 헌법’. 낡고 올드한 구형 외투처럼 몸에 맞지 않게 된 상황이다. 국민의 민도(民度)가 높아졌고 시대정신도 달라졌다. 업그레이드된 새 헌법을 찾아야 한다. 국민 기본권을 강화하고 대통령 한 사람에게 과도히 집중된 권력을 보다 내려놓고 위임하는 방향으로 개헌을 서둘러야 한다. 적폐를 청산하고 새 정치를 구현하겠다면서 헌법과 국정운영시스템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권력욕에 떼밀려 이를 바로잡지 못하면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잘못 가리키고 있는 이정표처럼 국민을 힘들게 한다. ‘제2의 박근혜’가 나오면 안 된다. 대선후보들의 인물됨과 정책을 세심히 점검해야 한다. 후보들마다 개헌, 사드, 연정(聯政), 일자리, 남북관계 등에 관한 견해가 각양각색이다. 이 중 나라의 틀을 바로세우는 개헌만큼은 절대 뒤로 미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알고 있다. 김영삼·김대중·이명박·박근혜 대통령 모두 선거 때는 재임 중에 개헌하겠다는 공약을 했었음을. 그리고 그 중 단 한 사람도 약속을 지킨 이가 없었음을. 정치권에서는 지금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만이 개헌에 소극적이다. 문재인 후보는 “필요하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개헌을 매개로 한 비문연대에 점차 포위돼가고 있는 형국이다. 명약관화하다. 개헌을 반대하면 민심을 저버리는 일이다. 정치지형이 요동치고 대권가도에 뜻밖의 적신호가 켜질 수도 있다. 유(U)턴해야 한다. 이정표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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