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양산 통도사, 밀양 만어사 기행]
통도사 대웅전엔 부처가 없다?
대신 금강계단에 진신사리 모셔
강 따라 동서로 길게 자리한 사찰
천왕문에서 대웅전까지 한눈에
맑은 종소리 내는 만어사 경석
2억년 보내며 신비로운 벌판 이뤄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는 모든 불자에게 마음의 고향으로 통한다. 어떤 것으로도 깰 수 없고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깰 수 있는 금강석(다이아몬드)과 같은 진리, 즉 불법을 통해 일체중생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했던 부처의 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통도(通度)’를 곱씹어본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 한 구절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불교의 핵심인 자비나 기독교의 진리인 구원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억겁의 세월 너머 석가와 만나는 통도사
통도사로 가는 길, 저 멀리 펼쳐진 산맥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속세가 범접할 수 없는 웅장함이 감돌면서도 물결치듯 흐르는 능선이 겹겹이 이어져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축산이다. 통도사 뒤편으로 병풍처럼 둘러선 영축산은 원래 석가모니 당시 인도 마가다국(Magadha) 왕사성의 동쪽에 있던 산 이름이다. 이 산에서 석가는 ‘묘법연화경’을 설법하여 많은 중생을 구제했는데 이 장면은 불교에서 가장 추앙받는 광경으로 꼽힌다.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는 ‘이 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닮았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통도사로 지었다고 한다. 신용철 통도사박물관 문학박사에 따르면 실제 두 산의 위쪽에 있는 바위의 생김새가 서로 비슷하다고 한다.
통도사 초입, 소나무숲길이 시원스레 나 있다. 짙은 초록빛에 청량감이 감돌았다. 숲길을 지나오니 반달 모양의 아담한 삼성반월교가 통도사로 들어가는 첫 문, 일주문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사찰 주변은 깨끗하고 아늑했다. 번잡한 마음까지 정돈되는 느낌이 들었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사찰 안으로 들어서니 염불 소리와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경내를 가득 메웠다. 속세의 소리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치열함마저 느껴졌다. 범종루와 삼층석탑 등을 지나 대웅전에 이르기 전 마지막 문인 불이문(不二門)에 다다랐다. 불이(不二)는 ‘둘이 아닌 경지’ 즉 생과 사, 만남과 이별과 같은 상대적인 모든 것들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다. 궁극적으로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해탈문’으로도 불려서일까. 여기까지 이르러서도 버리지 못한 속세의 작은 번뇌조차 다 털어버리라는 주문이 들려오는 듯했다.
크고 작은 전각들을 지나 드디어 대웅전에 이르렀다. 닫힌 문을 조심스레 열어 보았다. 안에는 열댓 명의 불자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불상이 없었다. 어두운 대웅전을 희미하게 밝혀주는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유리창이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곳을 향해 연신 절을 올렸다. 까치발을 들어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어스름한 가운데 시선에 잡히는 무언가 있었다. ‘아! 저거다.’ 유리창 너머로 뾰족한 탑의 일부처럼 생긴 것이 보였다. 바로 석가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의 윗부분이다. 순간 내가 선 이곳에서 석가가 있는 저곳까지 억겁의 세월이 흘러갔다.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이 불자들의 믿음과도 통(通)하는 순간이었다.
신용철 박사에 따르면 금강계단에서 ‘금강’은 금강석(다이아몬드)을 말한다. 이는 다이아몬드의 특성처럼 어떤 것으로도 깰 수 없으면서도, 또한 어떤 것도 깰 수 있을 만큼 단단한 부처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는 “금강계단은 불제자가 될 사람에게 그 이전에 행했던 죄를 물로 씻는 관정의식과 또 앞으로 부처의 법을 지키며 살겠다고 다짐하는 수계의식을 행했던 장소”라며 “초림의 예수가 물가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부처든 예수든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씻어야 했다. 그 후에야 제자로서 지켜야 할 법(法)도 받고, 또 그것을 지키겠다는 약속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대웅전 동쪽 방향에 섰다면 이제까지 지나온 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자. 통도사에서만 느낄 수 있는 한국 건축의 백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일주문부터 천왕문, 불이문, 대웅전이 완만한 곡선으로 마치 활이 휘어진 듯 이어져 있다. 그야말로 ‘통(通)했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모습이다. 이러한 시각적 효과 덕분에 천왕문에서도 사찰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대웅전의 꽃창살을 볼 수 있다. 이는 남북은 좁고 동서로는 강을 끼고 길게 이어진 지형상 특징을 그대로 살려 지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만어사 만어떼가 들려주는 해탈의 종소리
통도사에서 밀양 만어사(萬魚寺)로 향했다. 통도사와 마찬가지로 부처와의 필연을 유래로 간직한 곳이자 밀양의 3대 신비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해발 670m 정도의 만어산에 위치한 만어사는 통도사의 말사이기도 하다. 만어사로 가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구불구불 오르다 보면 푸른 이끼를 입은 너덜겅(돌이 많이 깔린 비탈)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어느 산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돌이 아니다. 자동차만한 바위부터 맷돌만한 돌까지 모두 파도가 넘실거리듯 만어사를 향해 있다. 모나지 않고 대체로 둥그스름하여 멀리서 보면 마치 바다 속 물고기떼와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만어석(萬漁石)이다.
만어사 앞쪽으로 넓게 펼쳐진 만어석의 여정이 궁금해진다. 바다에서 올라온 것인지, 땅에서 솟아난 것인지 ‘이 산중턱에는 어쩐 일이냐’고 조심스레 두드려 보았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렇게 바윗돌 틈을 옮겨 다니며 몇 차례 묻다가, 꾀를 내었다. 두드려본 흔적이 남아 있는 돌들을 골라 두드렸다. 순간 맑은 쇳소리가 났다. “이거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절로 나왔다. 수억 년 전 고기떼가 들려주는 심해(深海)의 소리다.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바다에서 올라온 이들이 이렇듯 종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저편에선 더욱 청아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실제 돌들 가운데 3분의 2가량은 맑은 쇳소리나 종소리, 옥소리를 낸다고 한다. 세종대왕 때 편경(돌을 깎아 만든 조각들을 매달아 두드려 소리를 내는 악기)을 만들 때도 이곳의 돌을 가져다 쓴 것으로 전해진다. 지질학적으로 이 돌들은 2억 년 이전 고생대말 중생대 초 생성된 녹암층이라 불리는 퇴적암의 일부다. 그래서 청석(靑石)이라고도 한다. 해저에서 퇴적된 지층이 반복된 해침과 해퇴로 풍화작용을 일으킨 후 빙하기를 몇 차례 거치는 동안 지금과 같은 암괴들을 형성해 벌판을 이루게 됐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추론이다. 실제 젖은 옷을 만어석에 널어 말리면 바닷가의 비린내가 난다고 한다.
◆불법의 진의 헤아려 나라 구한 사명대사
통도사가 오늘날 불자들의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명대사 덕분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약탈당했던 통도사 금강계단의 진신사리를 일본에서 찾아와 계단에 다시 모신 이가 사명대사다. 사명대사의 본거지도 밀양시 단장면에 있는 통도사의 말사 표충사다. 임진왜란 당시 3000여 명의 승병을 이끌어 호국불교의 중심이 됐다. 사명대사는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처에서 승의병을 모아 700여 명의 승군을 훈련시켰다. 의승도대장이 된 뒤 1593년에는 명나라군과 더불어 평양성~개성~서울을 되찾는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뒤인 선조 37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일본의 새로운 위정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8개월 동안 머물면서 성공적인 외교 성과를 얻었고, 3000여 명의 조선인 포로를 데리고 귀국했다. 그때 대사는 일본 조정에서 천주교 신부를 만나 서로 염주와 은제 십자가를 교환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최초의 십자가라고 한다.
사명대사는 불법에서 금하는 ‘살생(殺生)’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중생의 구제 없는 법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임금에게 승병 모집을 허락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려 직접 의병을 모았고 훈련을 시켰다. 불법을 지식적인 차원에 가둬두지 않고 그 진의를 헤아려 몸소 행했던 것이다. 지식과 문자가 넘쳐나는 오늘날, 이를 대하는 우리도 사명대사와 같이 진의를 헤아리고자 하는 의식적 행함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