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발달은 직업을 변화시켰다.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는가 하면, 많은 직업이 하나둘씩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사진 속,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추억의 직업들. 그 시절을 살았던 세대에겐 아련하고, 젊은이에겐 그저 신기한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그때가 있었기에 현재도, 미래도 존재하는 법. 이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추억의 직업을 알아봤다.

 

▲ 행상이 옹기를 실은 지게를 지고 있는 장면을 찍은 사진 (출처:국립민속박물관)

시장망 돌며 각지의 물화 유통

교환경제 이뤄지게 한 중간자

임란 땐 산성에 식량·무기 운반
수원화성 축조 시 석재·목재 운반

조선후기 조직력 갖추게 되지만
일제시대와 경제발전으로 사라져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팔도를 누비던 ‘보부상’을 아는가. 과거 경제활동의 중심에 있던 보부상. 하지만 보이는 것처럼 단순히 물건을 거래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국가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보부상은 조직력을 구성해 나라를 지켜내기도 했다. 보부상은 어떤 활동을 했던 걸까.

◆보상+부상=보부상

보부상은 구입한 일용잡화를 지방의 시장을 돌며 판매하는 행상이다. 보부상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총칭하는 말이다. 보상은 주로 기술적으로 발달된 세공품이나 값비싼 사치품 등의 잡화를 취급했다. 이들은 정밀한 세공품을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했다.

반면 부상은 나무, 그릇, 토기 등 비교적 조잡한 일용품 등을 다뤘다. 이들은 상품을 지게에 얹어 등에 짐을 지고 다니며 판매했다. 이에 보상을 ‘봇짐장수’ ‘등짐장수’라고 불렀다.

이들은 보통 하루 동안 왕복 가능한 거리를 표준으로 삼아 형성된 시장망을 돌며 각지의 물화를 유통했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중간 역할자였던 셈이다.

부상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다. 또 고려공양왕 때에는 보부상을 시켜 소금을 운반토록 한 기록이 남아있다. 보부상이 활발해진 것은 조선시대였다. 이때는 단체를 이뤄 활동하기도 했다.

◆국가 정치적 활동에 동원

보부상은 국가의 일정한 보호를 받는 대신 유사시에 국가에 동원돼 정치적 활동을 수행해왔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행주산성 전투에 수천명의 부상들이 동원돼 식량과 무기를 운반·보급했다. 직접 전투에 나가 왜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의 행상 그림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행차할 때 부상들이 식량을 운반하고 성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이에 조정에서 전쟁 후 부상에게 벼슬을 주려 했다. 하지만 부상이 이를 사양해 어염·목기·수철 등 다섯 가지 물건에 대한 전매권을 부여했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축조할 당시에는 삼남지방의 부상이 석재와 목재를 운반했다. 이 목재를 다듬고 철기를 제련해 ‘장안문’을 만들었다. 홍경래의 난과 동학농민 운동을 진압할 때도 보부상이 동원됐다.

1866년(고종3) 병인양요 때는 전국의 보부상이 동원돼 문수산 전투와 정족산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무찔렀다.

보부상이 전국적으로 조직력을 갖게 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다. 1879년(고종 19) 9월에 발표된 ‘한성부완문’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지역적으로 각기 정해진 규율과 접장(보부상의 우두머리)이 있어서 조직을 통솔했다. 산재한 조직을 전국적인 상단으로 묶어 소규모 자본의 행상을 규합한 것이다.

보부상은 1881년 부상청이 생기고, 1882년 상리소가 개설되면서 일시 분리됐다가 1883년 혜상공국이 설치되면서 다시 통합됐다. 이후 상리국, 상리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898년(광무 2)에 조직한 황국협회는 보부상을 이용해 독립협회를 견제하려 했다. 보부상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사라졌다. 또 개항 이후 변화되는 새로운 경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보부상은 결국 자리를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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