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은 자연인으로 조용히 살도록 그냥 놔두는 게 옳았던 것 같다. 친박정치인이나 최순실씨 등이 자신들의 사익(私益)추구를 위해 이용하는 데 희생됐던 듯….”

헌재 재판관 8명이 전원일치로 파면 결정을 내린 다음날, 한 지인이 필자에게 한 말이다. 지인은 정치와 전혀 무관하게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전문직 직장인이만, 공감가는 언급이었다. 그와 비슷한 느낌으로, 무언가 애틋한 연민같은 감정으로 박 대통령을 바라본 국민은 적지 않았다. 애초 박 대통령은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게 옳지 않았을까.

박 전 대통령은 12일 삼성동 사저로 퇴거하면서 눈물에 젖은 모습과 그 얼굴 위에 오버랩된 웃음을 함께 보여줬다. 만감이 교차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마음을 넘어 실망스럽다. 그는 실기(失機)했다. 더 늦기 전에 하야했어야 했다. 물론 야당의 정치력도 부족했다. 탄핵정국에 집착하기보다는 거국내각총리를 추천하고 질서있는 퇴진을 수용하는 게 옳았다. 이어 대통합을 위한 사면조치가 뒤따랐더라면 좋았겠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굳이 특별검사의 수사결과와 헌재 결정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앞서 검찰이 수사해 이미 그를 피의자로 적시한 사안이다. 수사검사는 박 대통령 본인에게서 임명장을 받은 검사들이 웬만해서는 대통령에 대해 칼끝을 겨냥하지 않는다. 최씨를 위해 대통령 권한을 남용했다는 점이 공소장에 명시됐다. 박 대통령은 미르재단 설립부터 불법모금에 관여했다. 롯데그룹, 현대차그룹, 포스코그룹, KT, 그랜드코리아레저 등에 대해 압력을 행사한 혐의도 적시됐다. 정호성 전 비서관이 문건(47건)을 유출하도록 지시한 혐의도 있다. 박 대통령은 2014년 정윤회 문건 유출사건 때는 청와대 문서 유출을 국기문란행위로 규정했고, 비선의 국정개입 의혹은 거짓이라고 비판하지 않았던가. 국민이 도대체 납득할 수 있는 일인가. 그의 말대로 ‘더 밝혀져야 할 무슨 진실’이 또 있다는 말인가.

안타까운 세월호 사고와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한 팩트가 헌재 결정문에 적혀 있다. 박 대통령이 당일 오전 10시경엔 세월호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는 점, 무려 7시간이 경과할 때까지 집무실에 출근하지 않고 관저에만 있었다는 점, 해경청장에 대한 특공대 투입을 지시한 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 등이다. 오전 10시 30분 해경청장에게 전화해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했다는 주장에 대해 헌재는 “통화기록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해경청장은 앞서 9시 53분경 이미 특공대 투입을 지시했다”며 “대통령이 실제로 해경청장과 통화를 했다면 같은 내용을 다시 지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헌재는 그래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급박한 위험이 초래된 국가위기 상황이 발생했음에도, 박 대통령의 대응은 지나치게 불성실했다”고 지적했다. 그저 도의적인 불성실 문제만일까. 직무유기나 정식 국가공무원법 위반까지도 문제될 일은 아닌가.

이왕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그 자신 스스로 냉철히 판단했어야 했다. 쯧쯧, 혀를 끌끌 차게 된다. 대통령 주위 참모들 중에 민심을 있는 그대로 전하며 쓴소리, 직언을 아끼지 않은 인사 한 사람이 없었을까. 떳떳하다면 검찰수사에 응했어야 했다. 억울하다면 수사기관이나 헌재 재판정에 나와 입장을 밝혔어야 했다. 그것이 법 앞의 평등이요, 법치주의요, 리걸마인드이다. 공소장을 보면 주범은 최씨가 아니라 박 전 대통령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일찌감치 국민 앞에 사과하며 사임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대통령과 국무총리는 헌법기관이고, 헌재는 헌법의 최종수호기관이다. 동정적인 여론을 감안하더라도 박 전 대통령은 헌재 결정에 깨끗이 승복해야 했고,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은 조속히 대선불출마를 선언해야 한다. 그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수사에 의연히 응해야 하고 황 대행은 박근혜 정부 실패를 통회하는 마음으로 공정하고 엄정한 선거관리에만 진력해야 한다. 아무튼 한 시대가 거(去)했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은 공과(功過)에 대한 판단을 후대의 사가(史家)들에게 맡기고 겸허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바야흐로 대선정국이다. 아직도 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헛똑똑이’만 양산한다는 얄팍한 주입식·객관식 문답 교육의 영향 탓인가. 아니면 한반도 운기(運氣)의 흐름상 큰 인물이 나오지 않는 때라서 그런가. 강제퇴임 대통령의 눈물과 웃음이 함께 범벅이 된 얼굴을 보는 것처럼, 또한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가, 여야가 한 치 양보 없이 맞서고 있는 것처럼 헝클어지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산다는 것이 한스럽다. 위기에 처한 정치 경제 안보 교육 남북관계 등을 바로잡을 수 있는 새 시대가 어서 래(來)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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