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반도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 원불교 성적 제11호. 만덕산 초선 터(만덕암 터)는 만덕산 아래 좌포에 사는 김승지가 1910년경 부종병으로 고생하는 며느리 이현공을 위해 지어준 3칸 기와집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소태산 대종사가 만덕암에서 3개월 머물렀으며, 원기 9년(1924년)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후 12제자와 한 달 동안 선회를 열었다. 원기 89년(2004년) 초선 터 옆에 ‘원불당’을 건축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굽이굽이 전라북도 내륙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는 무진장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가니 만덕산이 나온다. 이 지역은 산세가 험해 사람의 접근이 힘들어 예로부터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 지역’이라고 이라 불려왔다. 만덕산성지는 무진장 지역 중 한 곳인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만덕산 남쪽 기슭 8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었다.

봄볕에 추위가 한 발짝 물러섰던 2월 말 만덕산 성지를 찾았다. 따뜻한 햇살과는 달리 만덕산 곳곳은 아직 녹지 않은 얼음을 품으며 겨울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원불교도들의 ‘영육쌍전(명상과 일을 통해 함께 수행)’ 수행터인 버섯재배 일터도 아직은 생명을 움틔우지 못하고 통나무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훈련원과 성지를 가득 채운, 하얀 줄기가 인상적인 후박나무들도 아직은 맨살로 수행자들을 맞았다. 이 후박나무들은 50여년 동안 만덕산훈련원을 지킨 양재승(94) 교무의 수고로 자랐다고 했다.
 

▲ 초선 터 옆에 건축된 ‘원불당’. ⓒ천지일보(뉴스천지)
▲ 소박한 원불당 내부의 모습. 기도를 위한 선방으로 꾸며졌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처음으로 ‘선’을 했던 곳

원불교가 만덕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원기 6년(1921년) 변산 봉래정사에서 정산 송규 종사가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어디든지 네 발 걸음 내키는 대로 가보아라”는 말을 듣고 길을 가던 중 만덕산 북쪽에 있는 미륵사 주지를 만나 미륵사에서 겨울 한 철을 지내면서다. 미륵사 화주인 최도화가 정산종사를 만난 후 정산종사가 미륵사를 떠나자, 정산종사를 찾아 전북 부안군 변산 봉래정사까지 왔다가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됐다. 그 후 소태산 대종사가 만덕산 만덕암(초선 터)에서 최도화의 주선으로 원기 7년(1922년) 말부터 3개월을 머물렀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9년(1924년)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후 며칠 뒤 만덕암을 다시 찾았다. 소태산 대종사는 만덕암에서 최초의 교화단 중앙단원인 정산 송규 정사, 단원인 오창건·김광선 ·최도화·노덕송옥·김대거·전삼삼·전음광·이청춘·박사시화·이동진화·김삼매화 등 12명의 제자와 선회를 열었다. 이때 선회 주관은 김광선이 했다. 12명의 제자와 음력 5월 한 달 동안 선회를 열었다. 이를 일러 만덕산 초선이라 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익산에 총부를 건설한 후 원기 10년에 훈련법을 제정·발표했고, 정기훈련법으로 그해 하선과 동선을 났다. 만덕암에서의 한달 선회는 장차 정기훈련을 시행하기 위한 구상과 준비 속에서 이뤄진 선회로 원불교는 이를 초선(初選)의 의미로 규정하고 있다.

원기 9년 11세의 대산 김대거 종사가 입선해 만덕산에서 소태산 대종사, 정산종사와 처음 만났다. 이 만남이 원불교의 3대 주법(主法)의 만남이다. 김대거는 뒷날 출가해 정산종사의 뒤를 이어 원불교 종법사에 올랐다. 김씨 문중의 많은 사람들이 원불교에 귀의했다.

▲ 50여년 만덕산성지와 만덕산훈련원을 가꿔온 올해 94세가 된 양제승 교무가 성지 소개를 부탁하자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선’과 ‘일’ 함께 어우러진 ‘공부’

만덕암은 한국전쟁으로 소실돼 빈 터만 남아 뒤편 암벽에 일원상을 그려놓았다. 원불교에서는 만덕암이 자리했던 터를 초선 터, 초선 터 일대를 만덕산성지라 부른다. 원기 89년(2004년) 만덕산훈련원에서는 최도화가 만덕암 옆에 산신각을 지어 공을 들이던 옛터에 기도실인 원불당을 지었으며, 만덕산훈련원에서 초선지와 오도재로 가는 갈림 길목에 적공실을 지어 초선의 의미를 새기며 적공할 수 있도록 했다.

원기 15년 임야를 매입하고 원기 17년에 산전개간을 하며 감나무 등을 심었다. 원기 52년 법당 겸 숙소를 짓고 원기 58년 양제승 교무가 부임하면서부터 만덕산 성지가 조금씩 수호와 함께 만덕산 농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만덕산 훈련원과 만덕산 농원은 일과 공부를 통한 사상선과 주생품인 표고버섯을 생산해오다 최근 영농법인을 설립해 만덕산 푸른 생명 효소와 각종 자연식품을 생산해 훈련도량과 산업도량을 겸하고 있다.

대산종사는 만덕산 성지에 대해 ‘만덕산 초선 성지는 갑자년 봄부터 열두제자에게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첫 시범 보이신 성지요, 영광 성주의 몇몇 제자와 전주 진안 서울 남원 등의 인연있는 제자를 규합하기 시작한 총부건설의 주비지(籌備地)인 성지’라고 설명했다.
 

▲ 원기 15년(1930년) 만덕산 임야 50정보를 이공주의 특지로 매입해 만덕산성지 수호와 산업생산·훈련도량으로 개발했다. 원기 67년(1982년) 전주교구훈련원이 개원돼 훈련기관으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해 원기 94년(2009년) 만덕산훈련원 본관을 신축해 훈련과 성지 순례의 편의를 담당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 교도들이 일을 하며 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덕산훈련원에서는 버섯을 재배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만덕이라 참 좋다”

덕(德)이 가득하다(萬)는 뜻인 만덕산성지의 이름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 7년 말(음력) 사산 오창건과 주산 송도성을 대동하고 만덕산 초선지에 첫 번째 행가해 3개월 적공할 때의 일화다. 이 일화 때문에 원불교도들은 만덕산의 만물에는 신성이 서렸다고 여긴다.

“만덕(萬德)이라, 만덕 좋은 이름이요. 안 그렇소? 사산.”

“돌맹이 하나, 풀 한 포기에도 불성이 서린 듯합니다.”

“옳지, 신심이 목석에까지 이르거늘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리요.”

“이렇게 앉아 있기만 해도 절로 선이 될 것만 같습니다. 선방을 차리면 필시 많은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

“만덕산은 지나가는 걸음으로 들른 곳이 아니라, 그대들과 더불어서 세세생생 인연 맺을 곳이며, 많은 부처가 나올 곳이요, 정말 좋은 곳이요, 곳곳이 부처이며, 일마다 불공이니, 선방을 차린다해도 구태여 자리를 고를 필요가 없을 것 같소.”

원기 77년 8월 8일 대산종사는 만덕암에 찾아오는 대종사와 정산종사를 회상하기도 했다.

“대종사님께서 만덕산에 오실 때 가까운 오도재를 넘어 오시지 않고, 항상 진안을 통해 좌포에 들러 만덕산에 왔지요. 또 관촌으로해서 좌포를 거쳐 만덕산으로 왔는데, 상달에 안씨 성을 가진 분이 항상 그 짐을 지게로 날라줬어요. 그러면 대종사님이 그 짐 값으로 10전을 줬는데, 당시 10전은 상당히 많은 돈이었죠. 그래서 안씨는 대종사님이 언제 오시나 하며 기다렸어요. 정산종사님도 항상 같은 방향으로 만덕산에 오셨어요. 그럴 때면 어린 아이들은 ‘빡빡 까까중’이라고 놀리곤 했지요. 지금 생각하니 두 분 어른님께서 가까운 오도재를 넘지 않고, 멀리 좌포로 돌아오신 것은 내게 인연을 걸려고 그러신 것 같아요.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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