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말레이시아 당국은 3월 10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암살된 김철이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이라고 공식 확인해 주었다. 말레이시아 현지에선 피살 사건 한 달 만에 김정남이라고 못 박은 공식 발표가 나오자 경찰이 김정남의 가족을 접촉했다거나, 북한 내 억류자 석방 협상에서 그의 시신이 협상 카드로 쓰일 것이라는 등 해석이 분분하게 나오고 있다.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은 이날 기자들에게 “신원확인을 위한 모든 조처를 한 결과 사망자의 신원이 김정남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신원을 어떻게 확인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는 김정남의 유족이 DNA 검사에 응했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답변을 거부했다. 할릿 청장은 “어떻게 확인했는지에 대해선 더 설명하지 않겠다. 증인들을 위해서 어떤 설명도 하지 않겠다”면서 “경찰의 할 일은 끝난 만큼 보건부에 시신을 넘길 것”이라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신원확인에 DNA 검사가 필수적이란 입장을 고수해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발언은 경찰이 김정남의 가족과 접촉하는 등의 방법으로 DNA 샘플을 확보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말레이시아 보건당국은 쿠알라룸푸르 종합병원 영안실에 보관 중인 김정남의 시신을 조만간 가족에게 인도하려 할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김정남의 자녀들이 그의 시신을 인수하러 선뜻 DNA 검사에 응할 처지가 못 된다는 점이다.

김정남 본처 신정희와 아들 금솔은 현재 중국 베이징에 있지만, 중국이 이번 사안에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인 점을 고려하면 김정남의 신원확인에 협조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최근 중국령 마카오를 떠나 제3국으로 도피한 후처 이혜경과 한솔·솔희 남매는 거주지 노출에 따른 신변위협 문제 때문에 당분간 외부 활동을 하기 힘든 상황으로 보인다. 이런 까닭에 현지 외교가에선 말레이시아 정부가 DNA 검사 없이 지문과 치아구조 등 여타 증거만으로 신원을 확인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고개를 들고 있다.

나아가 말레이시아 정부가 북한에 억류된 자국민 9명의 귀국과 관련한 협상에서 카드로 이용하려고 북측이 시신을 넘겨받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DNA 검사 문제를 해소해 줬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 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할릿 청장의 발언은 경찰 당국이 김정남 시신의 인도를 더는 막지 않겠다는 의미”라면서 “이 경우 통상 절차대로 일정 기간 가족이 나서지 않으면 국적 국가로 시신이 인도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말레이시아 정부는 지난 7일 국가안보보장회의(NSC) 긴급회의 이후 북한에 대한 강경대응에서 협상 모드로 급격히 방향을 전환했는데, 이런 시점에 김정남의 신원이 확인된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암살이 화학무기 VX에 의한 암살이란 점에서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을 비켜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국제화학무기금지기구(OPCW) 집행이사회는 9일(현지시간)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지난달 발생한 김정남 암살에 화학무기인 ‘VX’가 사용된 데 대해 “중대한 우려(grave concern)”를 표명했다고 우리 외교부가 10일 밝혔다. OPCW는 지난 7일부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진행 중인 집행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결정(decision)’을 채택했다. 결정에 따르면 OPCW 집행이사회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이 사건 수사를 완료하는 대로 공식결과를 받아서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이 문제를 지속해서 다루기로 했다. VX는 독성이 매우 강한 화합물로 액체와 기체 상태로 존재하며 주로 중추신경계에 손상을 입힌다.

VX는 원래 1950년대 영국에서 제초제로 발명됐으나 독이 너무 강해 그 후 냉전시대 화학무기로 발전했다. 피부를 통해 인체에 흡수될 경우, 신경가스인 사린보다 최소 1백배 이상의 독성을 발휘하며, 호흡기를 통해 흡입할 경우 두 배 정도 독성이 강하다. VX는 평상 기온보다 낮은 날씨에서는 오랫동안 잔존하며 아주 추운 날씨에서는 수개월 정도 효과가 지속한다. VX에 노출되면 수 분 만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인체에 침투하는 경로는 호흡기, 직접 섭취, 눈, 피부 등이다. 증상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콧물, 침, 눈물, 다한, 호흡곤란, 시력저하, 메스꺼움, 근육경련 등이다. 인체 자율신경의 불수의근과 샘에 손상을 입혀 근육이 지쳐 더 이상 호흡을 할 수 없게 된다. 북한이 이런 희대의 화학무기로 백주에 형제간 암살을 감행하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건 보통 오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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