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발달은 직업을 변화시켰다.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는가 하면, 많은 직업이 하나둘씩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사진 속,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추억의 직업들. 그 시절을 살았던 세대에겐 아련하고, 젊은이에겐 그저 신기한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그때가 있었기에 현재도, 미래도 존재하는 법. 이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추억의 직업을 알아봤다.

 

▲ 서울시영버스 내부구조 변경 모습. (출처: 서울사진아카이브)

버스에서 승객에게 하차지 안내
버스요금 받고 출입문 통제해

1980년대 말 자동화 시스템 도입
안내양 사양길 걷다 결국 사라져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오라이~” 탕탕

‘오라이’를 외치던 버스안내양에 대한 기억은 1970~1980년대에 살았던 사람이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추억일 거다. 이 당시를 담은 드라마를 봐도 안내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모자를 쓰고 바지나 치마를 입은 양복 형태의 제복을 착용한 안내양의 모습은 의젓해 보이기까지 하다.

◆1960년대 ‘여차장제’ 도입

안내양은 ‘안내’라는 단어와 함께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뜻하는 ‘양’을 합쳐 부른 말이다. 보통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이 안내양을 많이 했다. 이후 안내양이라는 명칭은 버스에 종사하는 승무원이 선호하는 단어가 됐다. 시내·시외버스에 종사하는 ‘여차장’으로 명칭이 대체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버스 안내양이 생긴 건 1920년대 후반이다. 당시 서울에서 ‘부영(府營) 버스’가 운행되면서 처음으로 여차장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1961년 6월 17일에는 교통부장관이 ‘여차장제’를 도입했다. 당시 버스 안내양은 시내버스나 고속버스 등 노선버스에서 근무했다. 버스안내양은 버스에서 승객에게 하차지를 안내하고 버스 요금을 받으며 출입문을 닫는 역할을 맡았다.

관광버스 안내양도 있었는데, 관광지 소개와 설명을 하는 역할을 맡았다. 사실 안내양은 애환이 서린 직업이었다. 이 당시여성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직종은 극소수 전문직 종사자를 제외하면 안내양이나 식모 등이 고작이었다. 이 때문에 시골에서 상경한 여성들은 빡빡한 노동시간에 시달림에도 묵묵히 일했다고 한다.

만약 버스 요금을 징수하다 계산이 안 맞으면 돈을 훔쳤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이 경우 알몸수색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인내가 필요했던 직업이었다.

▲ 버스안내양의 모습 (출처: 서울사진아카이브)

◆언어 구사능력 등 필요

시내버스의 경우 학력이 그렇게 중요하진 않았으나, 관광버스나 고속버스는 고졸 이상의 학력이 필요했다.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 사교술 등은 필수였다. 승객의 안전과 편안한 여행을 위해 좌석 중앙통로를 오가며 좌석 안전띠 착용 여부를 점검하고, 차멀미하는 사람은 없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장거리 노선을 맡는 안내양의 경우, 기존 단거리 운행 노선 버스 승무원을 호칭하는 ‘여차장’ ‘여조수’와는 달리 안내를 업무로 한다는 점을 부각해 ‘안내원’이라고 불리길 원했다고 한다.

◆1980년대 말까지 안내양 존재

버스안내양은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존재했다. 하지만 1982년 ‘시민자율버스’ 운행제가 실시되고, 정류장 자동 안내방송과 하차 벨(콜부저), 자동문 등의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안내양은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1989년 12월 30일자로 자동차운수사업법 제33조의 6항의 ‘대통령령이 정하는 여객자동차운송사업자는 교통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 한다’는 법조문이 삭제되면서 1990년부터 모든 지역에서 안내양 제도가 폐지됐다.

마지막 버스 안내양은 1989년 4월 김포교통 소속 130번 버스에서 근무한 38명이었다. 버스안내양의 모습은 지금은 발견할 수 없지만 “오라이”를 외치던 안내양의 모습은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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