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전 청와대 홍보수석

‘제주 올레(www.jejuolle.org)’라는 다소 낯선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대한민국에 없을 성 싶다. 3다(多의) 섬 제주도가 올레길 행차에 나선 육지 사람들로 번잡스러워졌다는 기사는 이제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제주올레는 지난해 대한민국 10대 히트상품으로도 선정됐다.

올레란 우마차가 다니는 큰 길에서부터 집 대문까지 이어지는 골목길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제주도에선 어디를 가나 화산암 돌담길이나 삼나무 길로 단장된 올레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제주도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그런 골목길에 불과했던 올레를 제주도 최대의 명품으로 재탄생시킨 주인공은 현재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인 서명숙 씨다. 제주 출신인 서 씨는 고려대 교육학과를 마친 뒤 월간 ‘마당’ 기자, 주간 ‘시사저널’ 편집장,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등 23년의 언론계 생활을 정리하고 무언가 이모작 인생을 할 일이 없을까를 궁리하기 위해 유럽 도보여행에 나섰다. 그는 세계도보여행의 메카라는 스페인 산티아고로 홀연히 떠났다. 산티아고를 걷는 동안 그는 인생에 큰 전환점을 준 여행자를 만났다.

산티아고의 그 한없는 황홀경에 넋이 빠져 걷던 그에게 동행했던 한 영국인은 “돌아가 너는 너의 길을 만들어라. 나는 내 나라에서 나의 길을 만들겠다”라고 제안한다. 그때 그의 눈앞에는 번쩍하고 고향 제주의 아름다운 올레길이 떠올랐다. 그는 소리쳤다. “바로 이거다!” 귀국한 그는 곧장 제주에서 걷기코스 개발에 나섰다. 이렇게 개발된 올레길은 현재까지 무려 19개 코스에 이르고 총 길이만 약 312km에 달한다. 지난해에는 공식적으로 등록하고 코스를 누빈 순례객만 25만 명인데 등록하지 않은 경우까지 합하면 올레길 동반자는 서너 배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필자도 지난 3일 제주 올레길을 걸었다. 말로만 듣던 올레길이었지만 감회는 남달랐다. 이번에 걸은 길은 ‘제주 올레’가 공식적으로 개발한 19개 코스에는 없는 길이었다. 이름하며 ‘제주 4·3 민주 올레’ 코스였다.
이해찬(전 총리) 시민주권 대표,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영화감독 변영주 씨 등 35명의 제안으로 올 초 발족한 ‘2010 민주 올레(cafe.daum.net/minjuwalking)’가 지난 ‘3·1절 민주 올레’에 이어 두 번째로 기획한 올레행사였다. ‘아픔을 딛고 걸음마다에 소망을 담다’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4·3 민주 올레는 제주 4·3사건 비극의 현장을 걷는 이색행사였는데 서울에서 내려간 인사를 포함해 현지인까지 200여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북제주군 선흘리 동백동산 입구를 출발해 동백동산 습지→선흘분교→낙선동 4·3성→목다운목→억물→북촌 돌하르방 공원→북촌초등학교→너분숭이까지 약 9.5㎞를 4시간여 동안 걸었다. 코스는 절묘하게도 4·3사건의 역사적 현장을 감싸고 돌게 구성돼 있었다. 처음 출발한 선흘리마을은 사건 당시 무장대의 영향이 강했던 중산간 마을이어서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소개되면서 폐허가 됐던 곳이다. 낙선동 4·3성은 무장대를 차단하기 위해 경찰의 감시아래 강제로 동원된 주민들이 쌓은 석성이다. 순례코스의 종점인 북촌리는 가슴 아픈 사연으로 가득한 동네였다. 1947년 8월 경찰관에 대한 폭행사건과 48년 6월 우도지서장 살해와 납치사건이 북촌리 청년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면서 토벌대에 의해 엄청난 희생자를 낸 지역이다. 4·3 당시 사건으로는 최대인 400여 명이 한날한시에 숨을 거둔 것이다. 현장에서 만난 4·3사건 유족회 관계자는 “지난 10년 민주정부 때 겨우 4·3사건이 명예를 회복했는데 정권이 바뀌자 또 다시 평가가 원위치하려 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그래서였을까. 정운찬 총리는 이날 다른 일정을 이유로 제주에서 열린 공식행사에 불참했다.

‘2010 민주 올레’는 오는 19일에는 대학로 등에서 ‘4·19 민주 올레’를, 5월 18일에는 ‘5·18 민주 올레’를 각각 열 예정이다. 화사한 봄날에 그날의 함성을 되새기며 역사적 현장을 가족들과 함께 둘러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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