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부터 사람은 강에 의존하며 살아왔다. 오늘날 강주변으로 옛 유적이 발견되는 것은 강이 식생활의 중요한 장소임을 보여준다. 서울의 한강도 마찬가지다. 한강 주변에서 발견된 유적은 여러 시대를 담고 있다. 이는 한민족의 인류사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이와 관련, 한강유적에 담긴 삶을 알아봤다.

 

▲ 신석기시대 움집체험 모습ⓒ천지일보(뉴스천지)

대표적인 신석기 집터유적 발견
1925년 대홍수로 세상 첫 공개

빗살무늬토기 등 유적 출토 돼
청동기·백제 문화층도 함께 발견

움집 안팎으로 저장 구덩이 발견
수렵·어로활동 등으로 음식해결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5000년을 전후한 신석기인의 삶은 어땠을까. 이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이 바로 서울 강동구 ‘암사동 선사유적지’다. 어로·수렵활동을 했던 이들에게 강은 중요한 곳이었다. 한강 유적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관련, 암사동 유적지를 찾아가 봤다.

◆신석기시대 대표적인 집터 유적

6일 오전에 찾은 암사동 유적지는 한강유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집터 유적이다. 서울 한강이 곡류하는 지점에 있으며, 강 건너에 아차산이 있다. 암사동 유적지가 중요한 이유는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 중 최대의 마을 단위 유적이기 때문이다.

이 유적은 우리나라 중서부지역의 신석기문화를 대표하고 있다. 또 당시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979년 사적 제276호로 지정됐다.

신석기인은 물과 식량 자원이 풍부한 곳에 정착생활을 해야 했다. 그래서 신석기시대 유적은 주로 바닷가와 도서지역, 큰 강 주변에 분포했다. 한강유적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나온 것도 같은 이유다.

실제로 암사동에는 3개의 문화층이 발견됐는데,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신석기문화층이 유적의 주 문화층으로 발굴지역 전역에서 확인됐다. 민무늬토기, 이중구연토기, 방주차, 청동촉 등이 출토된 청동기 문화층과 백제시대 문화층도 함께 발견됐다.

서울 암사동 유적은 전체 면적의 극히 일부에 국한된 발굴조사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지만, 규모면에서는 한반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신석기 시대 유적의 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 빗살무늬토기 ⓒ천지일보(뉴스천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발견

암사동 유적은 어떻게 세상에 공개된 걸까.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로 토기·석기 등 유물이 노출되면서였다. 이때 일본학자 요코야마, 후지타 등이 당시 암사리의 한강변에서 엄청난 분량의 토기와 석기를 수습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뒤 별다른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 대학연합발굴팀에 의해 발굴이 이뤄졌다.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연차적인 계획 발굴에 착수해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에 걸쳐 발굴조사를 했다. 발굴조사로 서울 암사동 유적은 신석기시대에 이른 시기로부터 늦은 시기에 걸치며, 연대는 방사성탄소 측정 결과 6400년부터 3500년에 걸쳐 있음이 확인됐다.

◆남한지역 중 집터 발견된 곳은 2~3곳뿐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신석기시대 유적은 수백 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집터가 확인된 곳은 불과 열군데 미만이다. 특히 남한 지역의 예는 고작 2~3군데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암사동 취락 유적이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연구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 신석기시대 재현 모형 ⓒ천지일보(뉴스천지)

발굴을 통해 30기의 집터와 딸린 시설, 돌무지 시설이 드러났다. 집터는 모래땅에 움을 파고 지었으며 집터 한가운데는 강돌을 둘러 만든 화덕시설이 보인다. 입구는 주로 남쪽을 향했다. 기둥구멍은 한집에서 여러 개가 나타나는데, 이는 주기둥과 함께 이를 버텨주는 보조기둥 혹은 이전의 기둥을 갈 때 새로 난 자리가 섞여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석기시대는 완전한 생산경제의 단계가 아니고, 일부 수렵, 채집, 어로에 의존하는 경제단계였다. 이에 대형 저장시설보다는 대부분 간단한 저장시설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때 주로 이용된 저장시설은 토기 또는 모래땅을 파서 만든 저장 구덩이였으리라 추정되는데, 암사동 유적에서는 움집의 안팎에 모래땅을 파서 만든 저장 구덩이가 여럿 발견됐다.

암사동 움집은 한강을 끼고 널찍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와 같은 입지 선택의 경향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 기반이 고기잡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이는 어망추, 작살 등 어로 도구들이 출토되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 신석기시대 재현 모형, 밭농사를 짓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채집·어로활동으로 식생활 해결

신석기인은 계절에 따라 주변에서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는 도토리, 살구 등의 열매와 식용 뿌리를 채집했다. 또 사냥과 고기잡이를 통해 기본적인 식생활을 해결했다. 5000년 전 무렵부터 잡곡농사가 널리 보급되면서 조·기장도 중요한 식량으로 이용됐다.

특히 도토리는 신석기인이 즐겨 먹던 음식으로, 갈돌·갈판으로 제분해 익혀 먹었다. 식물성 식료 외에도 단백질이 풍부한 사슴, 멧돼지, 고라니 등을 사냥해 식량을 확보했다. 바닷가에 살았던 사람들은 고래, 돌고래, 강치, 대구, 연어 등을 창을 이용해 포획했다. 소라, 고동, 굴 등도 채취해 먹었는데, 이는 신석기인이 즐겨 먹던 해산물이었다. 여러 종류의 생선뼈, 조개, 동물 뼈가 발견되는 패총유적은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 모습을 잘 보여줬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