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천체 원리로 시계 만들어
‘앙부일구’ 유동인구 많은 곳에 둬
백성도 시간 확인할 수 있게 해
관리 수고 덜고자 ‘자격루’ 제작
과거시험 볼 땐 ‘초’ 활용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친구, 내일 유시(오후 5~7시)에 주막에서 막걸리 한 잔하세.”

“허허, 그럽시다, 늦지나 마시게나.”

시계가 없던 옛날에는 어떻게 시간을 알았을까. 처음에는 물이나 모래, 천체가 흘러가는 속도를 통해 시간을 짐작했다. 시계를 만들 때도 이런 원리를 이용했는데, 조선시대에 과학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시계가 등장했다.

◆한양 중심가 설치된 해시계 ‘앙부일구’

특히 가장 대표적인 시기가 세종 대였다. 세종은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그를 돕는 장영실이 당대에 있었으니, 이시기는 그야말로 과학의 꽃이 핀 때였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해시계가 개발됐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게 ‘앙부일구’다.

1434년(세종 16)에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공을 반으로 잘라 놓은 것처럼 생겼고 가운데에 바늘이 세워져 있다. 해가 뜨면 바늘에 그림자가 생기는 데, 이를 통해 시간을 확인했다.

지구의 자전축과 평행하게 기울어져 있는 그림자가 오전 6시경부터 오후 6시경의 낮 시각을 가리켜주는 7개의 세로줄, 그리고 24절기를 나타내는 13개의 교차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가리키며 현재의 시각과 절기를 알려준 거다. 절기가 파악되니, 농사에 큰 도움을 줬다.

앙부일구가 다른 해시계와 달랐던 점은, 시계 위에 글자 대신 12지신 짐승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는 거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앙부일구는 서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됐다. 혜정교와 종묘는 한양의 중심도로가 있는 곳으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었다. 세종은 앙부일구를 궁궐에만 설치하지 않고 백성이 모두 볼 수 있게 했다.

실제로 1434년 세종실록에 따르면 “신(神)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요, 각(刻)과 분(分)이 빛나니 해에 비쳐 밝은 것이요, 길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런 앙부일구도 단점이 있었다. 밤이나 궂은 날씨에 시계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

◆스스로 울리는 물시계 ‘자격루’

이를 보완해 준 게 바로 ‘자격루’다. 자격루라는 이름은 ‘스스로 북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물시계’라는 뜻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알람시계와 비슷하다. 물통이 가득 차면 소리를 내는 장치가 작동해서 종을 울려 준 것.

사실 자격루가 발달하기 이전에도 ‘물시계’는 있었다. 당시 물시계는 오늘날 기상청과 같은 ‘서운관’에서 관리했는데, 궁궐 안의 물시계 옆에 관리가 항상 서서 관리했다. 서운관 관리는 때가 되면 종을 울려 시간을 알리는 책임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밤을 새워서 근무하다 보니 시각을 알리는 데 관리들의 실수가 잦았다. 그럴 때면 중벌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이런 관리들의 수고를 덜고자 만든 게 자격루다.

자격루는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시보장치(시간을 알리는 장치)였다. 하지만 자격루는 그다지 오래 사용되지는 못했다. 현재는 중종 때 다시 만든 자격루의 일부만 남아있다.

◆그 밖의 시계들

과거시험장에서도 제한된 시간 안에 시험지를 빨리 풀어야 했다. 이때는 ‘초’로 시간을 확인했는데, 촛불이 다 탈 때까지 답안지를 제출해야 했다. ‘향시계’도 있었는데, 이는 절에서 많이 사용했다.

참나무에서 나는 버섯을 잿물에 삶은 뒤 가루를 내어 돌 따위에 글자 모양으로 파놓은 홈에 채워 놓은 것인데, 여기에 불을 붙여 그 타들어 가는 정도에 따라 시각을 판별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도 백성의 삶 속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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