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逵)는 이렇게 읊었다.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 동방규가 흉노의 왕과 정략결혼을 위해 홍안의 볼에 눈물지으며 고국을 떠난 전한(前漢) 원제(元帝) 때의 궁녀이며 미인인 왕소군(王昭君)을 그리며 지은 시다. 봄이 봄 같지 않은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의 우리에게도 비슷한 것 같다. 이 땅에 어김없이 꽃 피고 새 우는 봄은 찾아와 양광(陽光)이 완연하지만 우리의 내면은 겨울 추위에 얼어붙은 ‘동토(凍土)’ 그대로다. 대인과 군자가 없는 협량하고 어지러운 정치 탓 아닌가. 정치인들은 봇물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와 둘로 찢어진 ‘촛불’과 ‘태극기’의 민심을 무법천지로 방치하고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각자의 이해에 따라 선동하기에 바쁜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언 몸과 마음을 포근하게 녹여야 할 봄에 ‘법치(法治)’와 ‘정치’가 실종돼 국민의 마음을 동토로 남아있게 하는 것은 실로 통탄스럽고 두렵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일을 이틀 앞둔 1919년 3월 1일은 온 나라에서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이 이구동성으로 일제히 터져 나온 역사적인 날이다. 고종 황제가 일제의 마수(魔手)에 의해 독살됐다는 신빙성 높은 소문까지 번져 거리는 성난 인파로 메워지고 넘쳤었다. 그런데 그렇게나 많은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거리를 메웠어도 ‘독립’을 염원하는 딱 하나의 민심이 그들을 지배하고 결속시켰을 뿐이지 서로 헐뜯고 찢어지게 하는 딴 마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때의 일치된 그 ‘근본(根本)’으로부터 너무 멀어지고 달라져 있다. 그로부터 98주년이 되는 2017년 3.1절은 ‘천사의 군단’과 ‘악마의 군단’이 거리에서 쫓고 쫓기는 것 같은 혼란한 상황이 벌어졌다. 바로 민심이 하나는 선이고 다른 하나는 악이듯이 ‘촛불’과 ‘태극기’로 갈라져 격렬히 아옹다옹하며 다투지 않았나. 그 상극의 싸움은 도리어 이날 3.1절을 맞아 근본에 충실한 화합보다 아전인수(我田引水)의 견강부회로  절정을 향해 치달아 선조들을 뵐 낯을 없게 만들었다. 

이래서 이날 우리는 무법천지의 악몽과도 같았던 1946년 ‘해방공간’에서 맞은 첫 번째의 3.1절 기념식이 좌익진영과 민족진영으로 찢어져 연출했던 심각한 불화와 갈등이 부활된 것 같은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류(類)의 싸움은 그 때나 지금이나 선과 악의 싸움처럼 타협이 불가능하며 위험천만하다. 기실 그때의 그 갈등과 불화는 국토와 민족 분단의 비극을 재촉해 기어코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 되게 만들어 놓고야 말았다는 것을 오늘의 우리는 뼈아프게 되새겨야 한다. 그 전철이 되풀이 돼서야 되겠나. 국민의 분노가 차고 넘쳐 폭풍우 몰아치는 거친 바다처럼 성을 내는 것은 하늘의 섭리와 일치되며 자연스럽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순수성이 국민의 분노에서 빠지는 순간 자기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해 그들의 도구로 전락하기 쉬우며 두고두고 가슴을 찧게 된다는 것 역시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프랑스의 옛 정치학자이며 역사가였던 토크빌(1805~1859)은 이렇게 말했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선동과 변화, 위험이 가득한 생활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한의 자유를 구가하던 것으로부터 무한의 독재를 갈망하게 된다(To live in freedom one must grow used to a life full of agitation, change and danger. Otherwise one will move quickly from savoring unlimited freedom to craving unlimited despotism)’라고 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그들의 독자적인 반역 에너지나 사악한 정치공작에 의해서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사회혼란과 홍수를 이룬 실업자, 피폐한 민생이 그들 나라의 민중들로 하여금 독재의 본성을 숨기고 해결사를 자처한 그들에게 솔깃해져 그들의 등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한마디로 민중들은 자기들의 삶이 힘들어질 때는 독재의 선택도 불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선동이 난무하고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무쌍한 변화와 위험이 가득한 지금의 우리 형편에서 거리에 나선 우리 국민은 차분해지고 정치인들은 이들을 선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바람이 가만히 있고자 하는 나무를 흔들 듯이 정치가 가만히 있고자 하는 국민을 어지럽게 흔들어대면 국민의 생업이 불안해지고 흔들린다. 개인 생활은 개인 각자의 책임이 크며 그것이 기본이라고 한다면 절대로 틀리다고 할 수는 없으나 현대복지국가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차라리 이론이며 개념이다. 실제로는 국가의 책임이 크다. 바로 정치가 책임을 져야 하며 정치에 의한 ‘가버넌스(governance)’가 민생을 책임져야 한다. 그렇기에 대다수 힘 약한 사람들의 민생은 정치와 통치 권력의 작은 변화에도 엄청난 충격에 떤다. 깊은 산사(山寺)나 수도원의 수도승들이라 할지라도 속세의 정치권력의 변화와 부침, 혼란에 아주 무관하기는 어렵다. 또 소통이 사람 삶의 생명이며 소통의 매체를 사람마다 지니는 세상에서 속세에 무관할 수도 없으며 무관하게 놓아두지도 않는다. 지금 세상의 속성이 이렇다고 볼 때 대통령 탄핵이니 그것을 기필코 실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촛불’이나 기각해야 한다는 ‘태극기’의 집회가 우리 국민의 삶을 얼마나 들쑤시어 놓았는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더욱 걱정인 것은 이 아수라장 속에서 조기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관심이 온통 다음 정권과 새 권력 창출에 쏠려 있어 민생과 국가 안녕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나라는 그저 관성으로 또는 끄덕하면 정치인들이 국회에 불러 영혼이 없다고 야단치던 직업 관료들과 군인들, 각계의 전문가들과 새삼 든든하게 느껴지는 한미동맹에 의해 무탈하게   운영된다. 영혼이 없는 것은 정치인들이다. 북의 김정은은 잠재적인 권력 경쟁자인 그의 육친인 형 김정남을 죽인 잔인성으로 세상을 충격에 빠뜨렸다. 중국은 그 김정은의 핵과 핵미사일 놀음에 맞서 당연히 배치돼야 하는 우리의 ‘사드’ 배치에 보복을 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강하게 비난하고 맞서야 할 정치인들은 조용하다. 쫄았나? 그들에게 무슨 영혼이 있나. 제발 정신 줄을 놓지 말라. 국민의 마음에 진정 봄이 오게 해주어야 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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