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모처럼 만에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꺼내본다. 우리 역사의 시원과 광활한 고구려 역사의 자긍심이 물씬 묻어나는 이 책에서 단재는 이렇게 시작한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마음의 활동 상태의 기록이다.” 아와 비아의 투쟁! 그렇다면 지금의 탄핵정국에서 펼쳐지는 이 고단한 싸움도 결국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리고 이 투쟁의 결과물은 또 어떤 새로운 역사를 이어 갈 것인가.

반민특위 해산, 천추의 한으로 남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물론 그 운동 방식과 형태는 다를지라도 아와 비아의 투쟁과 그 본질은 비슷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역사에서의 거대한 사건과 인물은 반복된다는 헤겔의 말을 인용하면서 살짝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동일한 방식의 반복이 아니라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끝난다면서 헤겔이 이 부분을 놓쳤다고 지적했다. 1848년 프랑스 2월혁명으로 세워진 의회공화정이 불과 4년도 안돼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를 거쳐 독재체제로 귀결되는 역사의 아이러니, 혁명의 역사에 이어지는 반동의 역사는 이처럼 가끔 실소를 자아내기도 하는 법이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항일투쟁의 거대한 물줄기를 이어가던 우리 역사도 갑자기 ‘반동의 시기’를 맞은 적이 있다. 항일투쟁의 전사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스러지고 일제 앞잡이들과 폭력배들이 설치는 독재체제로 귀결된 것이다.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겠다던 ‘반민특위’는 그 친일독재세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며 불과 일 년 만에 간판을 내렸다. 이 또한 비극이기보다는 차라리 비통할 정도로 웃기는 ‘희극’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 즈음 서울 남대문 주변에서는 ‘3.1운동 기념식’도 아와 비아, 두 쪽으로 나뉘어 행사가 치러졌다. 일제 식민통치의 비극이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로부터 70여년이 흐른 2017년 오늘, 이번 3.1절에도 광화문광장에서는 태극기가 두 쪽으로 나뉘어 서로를 조롱하고 저주하며 적대시하는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70여년 전의 그 비통함이 이번에도 다시 ‘희극적’으로 반복된 셈이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친일세력, 반민특위 해체의 그 비극이 가슴을 때리는 대목이다.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는 식민지 시대와 독재시대 그리고 민주화 이후의 기득권체제는 결국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힘으로 해방을 맞지 못한 것이 통한이 됐다면 반민특위마저 무참하게 짓밟힌 반동의 역사는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 오늘 그 통한의 슬픔이 컸던 탓일까. 광화문광장에는 제법 많은 봄비가 내렸다. 그 광장으로 통하는 지하도의 한 모퉁이에 장애인들이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주장하며 ‘노란 리본’을 달고 장기 농성을 하고 있다. 태극기를 든 노인들이 그 앞을 지나가다 폭언을 쏘아 붙인다. “이 빨갱이 XX들아” “다 죽여버려야 돼”, 아마 70여년 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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