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윤복 ‘그네타는 여인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머릿결보다 중요한 머리길이
참빗에 기름 발라가며 빗질

머리 풍성치 않으면 가체 올려
어린 신부, 목뼈 부러 지기도

기녀·부녀자들의 머리장식 심해
‘가체 금지령’ 내려지기도 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시대 ‘미인(美人)’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곱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지녀야 했다. 이를 위해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기도 하고, 가체를 쓰기도 했다. 풍성함을 갖기 위한 조선시대 여인들의 생활을 들여다보자.

◆창포물에 머리 감아 머릿결 관리

28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조선 사대부가의 살림살이’ 자료에 따르면, 조선시대 여인들은 절일마다 특별한 머리감기를 했다.

먼저 삼월 삼짓날 감는 머리는 눈앞에 닥친 수난을 씻고 앞으로의 재앙을 막는다는 속신에서 비롯됐다. 특히 이날은 동쪽으로 흐르는 냇가에 나가 몸을 씻으며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물 흐르듯 소담하고 윤기가 난다고 하여 물맞이를 했다. 5월 5일 단오는 양의 기운이 꽉 찬 날로, 창포를 끓인 물에 머리를 감았다. 9월은 중양절이 있는 달로, 이때는 국화를 끓인 물에 머리를 감았다.

◆참빗으로 머리 길이 관리

하지만 여성들에게 머릿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머리 길이였다. 머리카락을 길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머리를 빗어야 했다. 이때 참빗과 얼레빗을 사용했다. 얼레빗은 나무로 만든 목소로 월소(月梳) 라고도 부른다. 이는 빗살이 굵고 성긴 반원형의 큰 빗으로, 한쪽으로만 빗살이 성기게 나 있어 엉킨 머리를 가지런히 했다.

보통 박달나무·도장나무·대나무·대추나무·소나무 등으로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제주도에서 나는 산유자로 만든 빗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얼레빗으로 머리를 빗은 후 머리카락이 빠져 나오지 않도록 참빗으로 기름을 발라가면서 빗질을 한다. 기름은 동백기름·아주까리·수유 등을 사용했다. 기름칠은 머리를 빗는 마무리 단계에서 했다. 특히 동백기름은 자연산 기름으로 피부에 해가 없다보니 옛날 여인들이 많이 사용했다. 접착성이 강하고 윤기가 나고 건조하지 않으며, 머리냄새를 없애주는 효과도 있었다.

▲ 얼레빗(왼쪽)과 참빗(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풍성한 머리 위해 `가체' 올려

풍성한 머리도 미인의 조건이었다. 만약 자신의 머리가 풍성하지 않으면 타인의 머리라도 얹어야했다. 그러다 보니 가발을 높이 올리는 가체가 여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였다. 어린 신부가 가체 때문에 목이 부러져 죽는 사건도 발생했다. 실제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이와 관련된 글이 실렸다.

‘요즈음 한 부잣집 며느리가 나이 열세 살에 다리(가발)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하였던지,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갑자기 일어서다가 다리에 눌려 목뼈가 부러졌다.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으니 아, 슬프도다.’

특히 기녀들의 가체 사치가 양반 부녀보다 더 심했다.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의 ‘그네 타는 여인들’ 그림을 보면, 긴 머리를 땋은 강한 인상의 여인이 뒤뜰에서 그네를 뛰고 있다. 가체를 얹은 여인들은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림 속 여인들은 자태와 머리 모양새로 미뤄 보아 기녀로 짐작된다.

‘단오풍정’에도, 긴 머리 여인이 나온다. 여인의 모습을 보면 머리를 크고 무겁게 양쪽으로 땋아 가운데를 댕기로 묶어 놓은 모습이다. 또 붉은 빛 치마를 입은 한 여인은 그네를 타고 있는데, 머리에 큰 가체가 씌어져 있다.

가체의 머리장식은 기녀 뿐 아니라 일반 부녀자들도 극심해 사회문제가 됐다. 이에 영조(조선 제21대 왕)는 ‘부녀발제개혁’을 내려 가체를 금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가체의 사치는 극도로 심해졌다. 정조 때 다시 사대부의 처첩과 여염의 부녀는 가체는 물론 본머리에 다리를 보태는 것을 금지했다.

얹은 머리를 하는 데 쓰는 다리는 천민이나 죄수의 모발을 잘라 사용했으며, 머리를 한 후 여러 가지 보석을 꽂았다. 이처럼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은 조선시대에도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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