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김정남 암살의 퍼즐은 8부 능선을 넘어서고 있다. 암살에 가담한 공작원들의 인원수와 보조 인원이 속속 드러나는 가운데 25일에는 이번 암살의 주된 공격 수단이 놀랍게도 화학무기의 일종인 VX로 밝혀졌다. 지난주 범죄의 호랑이 꼬리가 잡히더니 이제는 확연한 등이 나타나고 내주 즈음이면 그 머리가 드러날 판국이다. VX는 독성이 매우 강한 화합물로 액체와 기체 상태로 존재하며 주로 중추신경계에 손상을 입힌다. VX는 원래 1950년대 영국에서 제초제로 발명됐으나 독이 너무 강해 그 후 냉전시대 화학무기로 발전했다. 피부를 통해 인체에 흡수될 경우, 신경가스인 사린보다 최소 1백배 이상의 독성을 발휘하며, 호흡기를 통해 흡입할 경우 두 배 정도 독성이 강하다.

VX는 평상 기온보다 낮은 날씨에서는 오랫동안 잔존하며 아주 추운 날씨에서는 수개월정도 효과가 지속한다. VX에 노출되면 수 분 만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인체에 침투하는 경로는 호흡기, 직접 섭취, 눈, 피부 등이다. 증상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콧물, 침, 눈물, 다한, 호흡곤란, 시력저하, 메스꺼움, 근육경련 등이다. 인체 자율신경의 불수의근과 샘에 손상을 입혀 근육이 지쳐 더 이상 호흡을 할 수 없게 된다. 응급처치는 옷을 벗고 흐르는 물이나 식염수에 눈을 소독하고 물로 피부를 씻어냄으로써 오염물질을 제거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병원에서 해독제를 준비해 놓고 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루프 국제공항에서 지난 13일 김정남이 피살된 것과 관련 현지 경찰은 김정남 살해 혐의로 여성 두 명을 비롯한 남성 용의자를 체포한 상황이다. 이 가운데 여성 용의자 한 명이 김정남의 얼굴에 바른 독극물을 거론하며 “베이비 로션인 줄 알았다” “10만원 받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 뉴스레이츠타임스는 김정남 살해 혐의로 체포된 시티 아이샤(25)가 주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대사관의 안드레아노 어윈 부대사와의 면담에서 “김정남의 얼굴에 묻힌 독극물 VX를 베이비 로션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고 25일(현지시각) 전했다.

시티 아이샤는 ‘LOL’이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은 도안 티 흐엉(29)과 당시 범행에 가담해 김정남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안드레아노어윈 부 대사는 “누군가에게 속아서 김정남 암살에 가담했으며 TV 쇼를 위한 장난으로 믿었다”는 시티 아이샤의 주장을 전하기도 했다. 이어서 그는 “아이샤는 그런 행동을 하는데 400링깃(약 10만 2000원)을 받았다고 말했다”며 이와 함께 “제임스와 장이라는 이름을 거론했다”고 밝혔다. 제임스는 말레이시아 경찰이 이번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한 북한인 8명 가운데 리지우(30)의 영문 이름과 같은 것이다.

한편 말레이시아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김정남은 맹독성 물질 VX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살해 당일 공항에서 도안 티 흐엉과 시티 아이샤 두 명이 김정남의 얼굴에 손으로 독극물을 문질렀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이 김정남 암살에 신경성 독가스 ‘VX’를 사용한 사실에 대해 전 세계가 공분하고 있다. 북한 전문가이자 트로이대학 교수인 대니얼 핑크스톤은 25일(현지시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치명적인 신경작용제를 사용한 것은 금도를 넘은 일”이라며 “특히 공항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이를 사용한 것은 단순 암살을 넘어선 행위”라고 비판했다. 핵무기나 미사일에 밀려 간과됐던 북한의 화학무기 개발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일본 교도통신은 미국이 김정남 피살사건의 사실관계를 수집하며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보좌관을 역임한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 WSJ에 “VX 사용은 매우 심각한 사태”라며 “이러한 맹독성 신경작용제를 공공장소에서 사용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테러행위”라고 비난했다. 이어 “이 때문에 북한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분명히 차질을 빚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VX를 사용함으로써 북한이 김정남 암살의 배후를 자처하고,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자초했다는 지적도 쏟아지고 있다. CNN방송은 이날 “VX를 살인 무기로 사용한 것은 끔찍할 뿐만 아니라 아주 멍청한 행동”이라며 “이번 사건으로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입지는 최악으로 좁아졌다”고 주장했다. 한편 김정은 정권의 이번 모험은 핵무기에 이어 ‘약자의 핵무기’인 화학무기마저 보유했다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미국 등의 압박을 분산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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